정여송의 「천자문」 작가정신으로 세워진 정자의 미학
- 박양근(수필가, 문학평론가, 부경대 교수)
- 정여송의 〈千字文〉전문
千字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은다. 구백 구십 구 자도 안 되고 한 자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千字라야 한다. 그것을 매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못한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 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물 차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책임과 의무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 차서 넘친다. 자연현상과 인간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字판을 두들긴다. 상상의 줄이 끊기니 손가락도 따라 쉰다. 아무리 타자치는 속도가 빠르다 해도 생각이 앞서지 않으면 허사다. 이야기 길을 뚫으려 자판을 들여다본다.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세상이 천자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판 위에도 있지 않은가.
있다, 있어. 모든 것이 있다. 육친과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정이 있고, 어릴 적의 봉이와 경옥이와 명자가 있다.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와 악마의 화려한 춤이 있다. 꽃, 바람, 구름, 기쁨, 슬픔으로 돌고 도는 계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마음 속 깊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유행가 가사도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빼면 도로 ‘님’이 되는 인생사라나. 웃음과 울음이 있다. 육체를 치유하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희망의 길을 가리키는 금빛 이정표가 있다. 온갖 삶의 근본이 쫙 널려있다. 백 여섯 개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
文을 세운다. 건축가가 되어 집을 짓는다. 닮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겉모양만 다르게 줄지어 선 카페들은 질색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 멋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외형보다 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말을 걸 듯 겸손하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 그런 글집을 짓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등의 평가가 아니다. 언어를 다듬어 집을 짓는 즐거움이고, 마음속에 진득하게 또아리를 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해방감이다.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령 엽기다. 가로열쇠와 세로열쇠를 풀어가며 퍼즐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뚝딱 文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 (정여송「천자문」전문)
날씨가 포근해지면 봄나들이를 나서고 싶다. 소위 얼었던 날씨가 흥을 부리는 덕분이다. 철 이른 매미가 울고 계곡 녹음이 무르익은 곳에 숨은 듯 오롯한 정자에 올라 바람소리며 새소리를 한껏 들어보고 싶어진다. 그럴 땐 참으로 신기하리만큼 길을 가며 들을 때보다 바람과 새소리가 더욱 운치롭다. 똑같은 바람인데도 정자라는 은근한 분위기가 흥을 돋우는 것이다.
수필도 흥이 있어야 한다. 다시 읽고 싶은 수필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는 흥이 깔려 있다. 가슴에 켜켜이 쌓인 아픔과 슬픔을 녹여 미적구조로 빚어낸 수필 속에는 인식의 기쁨과 감동의 운율이 배어 있다. 그런 한 수필을 만나면 흥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수필은 한 송이 꽃과 같다. 꽃이 제 모습으로 피어나는 과정처럼 수필은 소재에 숨겨진 본질을 끌어올리고 의미요소를 접붙인다. “붓 가는 대로 쓴 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글맛이랄까. 힘들게 밭을 갈고 김을 맨 논밭일수록 바라보기에 좋고 많은 알곡을 거둘 수 있으며 작가가 땀을 흘리고 고뇌할수록 독자는 많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예전과 달리 주제와 제재와 문장 사이에 내적 질서를 이룬 수필이어야 다시 읽어볼 만하다. 좋은 수필을 기대하는 까닭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읽고 싶은 수필을 고전이나 근대수필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1970년대 이전의 수필은 대부분 감동이라는 겨자를 약간 뿌린 스토리 중심의 산문이거나, 도피적인 삶의 찬사이거나, 낙루(落淚)가 유도하는 신변기가 대부분이다. 설상가상 작가의 인격이라는 추를 얹어 다시 읽어볼 만한 수필로 대접받으려 한다.
진정으로 읽고 싶은 글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칠 희열을 전해야 한다. 그 요건은 “왠지”라는 정감과 “그래서”라는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극한의 상상력으로 우주를 향해 질문을 던져 생소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학적 고뇌를 담을 글이 그러할 것만 같다.
수필가 정여송은 얼굴이 없다. 세류를 벗어나 오직 수필창작에만 정신을 쏟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녀의 글을 찾아내어 끈질긴 상상력, 빈틈없이 직조된 문장, 충격적인 인식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첫 수필집『힘쓰는 여자』에 실린 대표작 중의 하나인 「천자문」은 이러한 문학적 좌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천자문」을 읽을 때면 깊은 계곡에 세워진 정자에 떠오른다. “참 멋을 아는 사람이 멀리서도 찾아오는 그런 글집”을 짓기 위해 “석류의 순수한 파열을 꿈꾸는 힘쓰는(作) 여자”가 세운 정자로 가는 길은 그래서 고독한 사색의 길이 된다. 나아가 토씨하나, 쉼표하나도 소홀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성을 꿈꾸는 수필사랑을 따라가면 문학만이 존재의 이유인 작가를 만나게 된다.
왜 그는 재미있고 가까이 하기 쉬운 수필을 마다하고 낯선 길 같은 수필을 간택하는가. 철저한 그리하여 초연하려는 작가성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란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인 만큼 낯익음을 얻기 위하여 작가의 코드를 해설하기로 한다.
「천자문」의 첫인상은 독특한 형식에 있다. 진흙 뻘밭에서 오롯하게 돋아난 연꽃 같은 형식미랄까. 단 한자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1,000자가 이것이다. 15매 내외의 길이와 열 서너 단락이라는 전통규범을 무시해버린 333자의 초장과 333자의 중장과 334자의 종장 구조는 마루와 기둥과 지붕으로 나누어지는 정자의 조형미를 떠올려 준다. 맑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선 여인의 아름다움도 이럴 것이다.
소재를 의미화 하는 상상력은 어떤가? 천자문은 서당아이들이 공부하던 필수 교과서라면 컴퓨터의 자판기는 대중문화시대를 기록해가는 점토판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천자문은 천 개의 글자가 필요하지만 컴퓨터 문자판은 106개만 있으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판기는 우주와 인간사를 조망하는 문에 해당된다.
세상이 천자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판 위에도 있지 않은가. 있다, 있어. 모든 것이 있다. 육친과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정이 있고, 어릴 적의 봉이와 경옥이와 명자가 있다.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와 악마의 화려한 춤이 있다. 꽃, 바람, 구름, 기쁨, 슬픔으로 돌고 도는 계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마음 속 깊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육체를 치유하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백 여섯 개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
우리는 하늘을 살피려면 고개를 들어야 한다. 천문을 읽고 미래를 예언하기 위하여 하늘을 쳐다보는 방식은 태곳적부터 인간에게 익숙해진 자세다. 그런데 정여송은 고개를 들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백여섯 개의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라는 후렴처럼 자판기 안에 우주가 있다. 이처럼 그의 변증법적 상상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초월할 정도로 파격적으로 구사된다. 그러면서도 점하나로서 ‘남’과 ‘님’을 가름해주는 섬세하고 해학적인 눈길을 곁들인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담은 애정으로 묶어진 이러한 지적 동감과 정서적 감동이 정여송의 수필을 만든다고 하겠다.
「천자문」이 지닌 다른 매력은 개인의 체험을 철학적 주제로 승화시킨 변용이라고 하겠다. 성경에서 “하늘이 있어라 함에 하늘이 만들어졌다”라고 말한 이래로 우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풀어야 하는 메타기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호는 상상 그 자체가 아닌가. 컴퓨터 자판기는 이처럼 천자문이 꿈꾸지 못한 상상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천자문」을 읽으면 마치 연금판(鍊金板)을 손에 든 연금술사의 고백을 듣는 듯하다. 관찰을 인식으로 승화시킨 이런 상상을 지금껏 찾지 못하였고 내로라 하는 수필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우리가 읽어야하는 글은 나이 먹은 노회한 글이 아니라 창신이 가능한 글이어야 한다. 현대수필이 책임져야 할 역할이 이것임으로 이 작품은 더욱 무거운 무게를 갖는 것이다.
정여송 수필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짧은 문장이 뿜어내는 강렬한 힘과 실험성을 놓칠 수 없다. 이런 의욕이 지나치면 일반 독자와 거리를 둘 수 있다. 사실「천자문」은 “천자 글자를 긁어모아 아무도 쓴 적이 없는 글”을 쓰겠다는 당찬 의욕에서 잉태한 글이다. 그럼에도 그 인고의 글쓰기에서 “장난질이고 소꿉놀이”라는 겸손한 여유 부림을 보면 누구든 이글을 향하여 발걸음을 한 발짝 더 당길 수밖에 없다. 성숙한 작가의 경험세계는 파격의 미 그 자체임을 말해 주는 부분이다.
「천자문」은 격조가 높다. 격조가 높은 만큼 속된 독자와 거리를 둔다. 웃음 속에 눈물을, 흥 속에 한을, 신명 속에 고독이라는 참 멋을 지키기 위하여 자격 있는 독자만을 허락해 준다. 그리고 글집이 완성되자 작가는 비로소 해방감을 얻는다.
文을 세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 멋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그런 글집을 짓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해방감이다.
좋은 수필에 어울리는 제재는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쉽게 얻지도 못한다. 체험의 반경이 좁아서가 아니라 소재를 객관화 하고 자기화 하고 상관화 하려는 운명 같은 치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쓴 수필인가, 짠(직조한) 수필인가를 좌우하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다.
쓰고 싶은 욕구, 정여송에게 그 욕구는 “생각의 짐을 벗어 버려야 얻는 해방감”처럼 ‘복된 액(厄)’이다. 그 작가주의(auteurism)를 모태로 태어난「천자문」은 독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선(選)한다.
출처 : | 조병렬과유양희 가족의 행복만들기 | 글쓴이 : 조병렬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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