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의 꿈
민명자
한 남자를 기억합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는 당당한 척했지만 불안한 눈빛까지는 감추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만족할까요. 자기가 가진 권력을 채찍삼아 은밀히 뒤로 챙긴 황금 자루들, 그 끝이 없는 욕망과 인간 삶의 비루한 단면을 보노라니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왜 갑자기 바퀴벌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어요. 원죄 없이 태어난 바퀴벌레에겐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둘의 속성이 무척 닮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여, 오늘은 그 내밀한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까 합니다. 그 집에 기숙(寄宿)하는 바퀴벌레의 눈을 잠시 빌렸어요. 자, 그들 삶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나를 바퀴벌레라고 부릅니다. 내가 사는 곳은 대한시 소망구 천사동 1004번지쯤이라 해둘게요. 곧이곧대로 밝히면 잡힐지도 모르니까요. 천사도 아니면서 천사동에 사는 나는 매일매일 숨바꼭질을 합니다. 이 집 식구들은 나만 보면 기겁을 하고 잡으려 달려들지만 그 때마다 마법의 기름이라도 바른 듯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몸매를 날쌔게 숨겨 싱크대 뒤에서 은둔자가 되곤 합니다. 인간들의 음식에 입을 댄 죄, 그 때문일까요. 어쩌면 잡식성이 내 죄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네요.
쫓고 쫓기면서도 나는 이 집을 떠나지 못합니다. 먹을거리가 여기저기 지천으로 넘쳐나고 썩은 냄새가 폴폴 나는 이곳은 내가 살기에 딱 알맞은 지상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가족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을지 늘 궁리한답니다. 나의 꿈은 오직 하나, 지상의 온갖 영화를 두루 누릴 수 있는 이 집에서 오-래, 아주 오-래 머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있습니다. 주인님이 나와 무척 닮았다는 점이지요. 자, 귀를 가까이 대보세요.
닮은 점 하나, 나는 앞뒤에 촉각이 있어서 공기의 흐름을 잘 파악합니다. 그래서 먹이를 찾아 어디든지 다닐 수가 있고 먹이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지요. 나의 주인님도 다르지 않아요. 어느 날, 주인님이 희희낙락, 사과상자를 낑낑대며 안고 들어왔을 때,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먹다버린 사과라도 실컷 먹을 수 있겠다싶어 신바람이 났지요. 그런데 그 상자 안에 사과 같은 건 없었어요. 글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신사임당 여사가 ‘50000’이라는 숫자가 찍힌 아바타들을 차곡차곡 거느리고 숨이 막히게 누워 있지 않겠어요. 히히, 웃으며 여사를 들여다보는 주인내외의 얼굴은 내 단단한 갑피만큼이나 번들번들 윤이 났어요. 주인님은 예민한 촉수로 먹을거리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무엇이든 불가사리처럼 잘 먹어 치운답니다.
닮은 점 두울, 나는 인간이 먹을 음식 위에 내가 먹은 것을 토해 놓아 수십 가지도 넘는 세균을 퍼뜨립니다. 배탈이 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식중독을 일으키게 하지요. 그게 바로 내 생존법칙이니 딱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숨어 지내는 건 타고난 제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날더러 나쁜 균을 옮긴다고 나무라지만, 나는 미물이라서 그렇다 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는 주인님은 왜 그럴까요. 검은 떡고물 콩고물이 있는 곳은 다 기웃거리면서 세상을 병들게 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닮은 점 세엣, 나에게는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이동경로가 됩니다. 생존력이 뛰어나 물위에서도 빠른 속도로 헤엄을 치고 암벽을 타듯 벽을 기어오르며 민첩한 몸놀림을 할 수 있지요. 날개를 달아 짧은 거리지만 비행능력도 있어요. 그러니 도망도 잘 치지요. 요리조리 법의 그물을 잘도 피해가는, 위대한 나의 주인님.
나는 어둠 속에서 활개를 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더 안전해져 질긴 생명력을 얻을 수가 있어요. 아 참, 게다가 번데기도 없는 불완전 변태를 하지요. 잡고 또 잡아도 징그럽게 무서운 번식력으로 살아남는 놈이 ‘나’올시다. 그 건 내 종족의 속성이에요. 다행히 세상엔 아직 어둠이 깊고, 나의 주인님도 어둠 속에서 더 생명력이 빛나니, 넓고 넓은 이 어둠의 천국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나의 주인님의 권력에 허리 굽히고, 주인님은 자기가 만든 신(神)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겁니다. 나의 주인님은 어디서든 복을 빌어요. 점술집에 가서 부적 사다 붙이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절에 가서 불공드리지요. 아마도 복을 준다고 하면 내가 숨어 있는 싱크대에 대고라도 절을 할 거예요. 아침마다 성서를 읊고 부처님께 합장하는 나의 주인님을 보는 것은 ‘즐거운 나의 일’ 중 하나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의 주인님은 복어처럼 볼록한 배를 안고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하늘만한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합장합니다. 아, 불쌍한 나의 주인님. 그분들 옷자락만 잘 잡으면 ‘강 같은 평화’와 ‘자비’가 넘치도록 철철 흘러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천상에서 그분들이 허허 웃으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얼른 주인님의 귀에 대고 속삭이지요.
‘당신의 배를 채워주는 부정 씨와 부패 씨에게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게 어떨까요.’
주인님은 내 말을 듣지 못하나봅니다. 간절히 복을 비는 주인님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주인을 따라 고개를 숙인 나를 보며 쿡쿡 실소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슬픈 날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거든요. 나의 천국에 살충제를 살포해서 나와 내 자손의 씨를 말리겠다는 겁니다. 아아, 나라고 우화등선하고 싶은 꿈이 왜 없었겠어요. 주인님도 한때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한숨짓곤 했지요. 달 밝은 밤 풀숲에서 창공에 빛나는 별을 보며 청정한 정신을 간구한다거나, 새벽이슬만 먹으면서 음유시인처럼 지상의 나무와 꽃과 새를 찬미하면서 고결한 꿈을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태생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는 우리 종족에게는 그런 꿈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아,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부처님. 우우우.
자, 이제 마지막으로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내가 맥을 못 추는 건 딱 한 가지, 그건 ‘청․결․한․환․경’이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와 나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이 과연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까요. 오늘은 아무래도 내 식솔들을 데리고 옆집으로 피신을 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알아요. 내가 가서 살 곳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이 세상 모든 바퀴의 꿈은 달리고 구르는 거지요. 그래야 살맛나고 그것이 존재이유니까요. 아무래도 나의 자손들은 질기고 질긴 잡식성 욕망의 바퀴를 달고 지구 구석구석을 무한질주하면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은, 행복한 예감이 드네요. 랄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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