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12월의 강가에서 / 최장순

희라킴 2016. 11. 24. 19:43




12월의 강가에서

 

                                                                                                                                      최 장 순

 


  나비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이런 날은 어디론가 달려가야만 한다. 차창을 부드럽게 껴안는 가벼운 눈송이와 어울릴 <december>를 들으면서.

 

  해마다 이맘때면 이 앨범을 연다. 앨범의 제목처럼 12월에 들으면 감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한해를 매듭짓는 일이란 가슴 뛰는 일이다. '감사'로 시작해 ‘고요’, ‘하얀 겨울’, ‘종소리’, ‘눈’, ‘깊은 밤’으로 이어지다가 종내에는 ‘평화’ 로 마무리되는 열두 곡은 마치 유리그릇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처럼 투명하다.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 ‘12월’은 앨범의 표지부터 마음에 든다. 빈 듯 충만한 설원에 묵묵히 고요를 응시하고 있는 자작나무 몇 그루가 인상적이다. 자연의 이미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그의 음악을 표지그림이 잘 대변해준다. 한해의 끝자락, 눈송이와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아름다운 곡이 겨울 드라이브를 부추겼다. 지난날들을 돌이키고 지친 마음을 감싸주는 그의 앨범을 들으며 12월의 강가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눈은 앨범의 첫 트랙 ‘thanks giving'의 선율을 타고 가볍게 춤을 추며 내 뒤로 물러난다. 속도에 길들여진 뒤차가 비상등을 켜거나 신경질적으로 추월을 해도 이미 주인의 속마음을 읽은 자동차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긋함을 즐겨보라는 듯 제 보폭을 조절하고 있다.


  올해는 지나온 어떤 해보다 의미가 컸다. 아홉수를 잘 넘겨야 한다는 평소 어머니의 말씀처럼 쉰아홉을 무사히 넘기고 맞은 새해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최소한 십년은 탄탄대로라고, 막연하지만 뭔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른 봄 우연히 얻은 열 평 남짓한 텃밭에 씨를 뿌렸다. 난생처음 농부가 되어 생명을 내 손으로 직접 보살피고 싶었다. 흙을 고르고 거름을 먹였다. 그리고 고랑마다 아이들 이름을 붙였다. 다섯 살 손자에겐 고추 고랑을, 아들과 며느리에겐 고구마 고랑을, 그림을 그리는 딸에겐 푸른 상추 고랑을 분양을 했다. 부지런을 떨은 내 농사법은 한동안 잘 먹혀들었다.

 

  이제 준 농부자격은 될 터이니 긴 것도 아니고 딱 한 달간만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가족여행. 드디어 오른 여행길, 굉음을 내지르며 비행기가 구름 위로 솟구치면서 지상의 모습들이 시야에서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조랑조랑 열린 고추며 치마폭 넓은 상추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는 긴 비행 끝에 브뤼셀 공항에 안착했고 그립던 딸을 품에 안았다. 예술가를 꿈꾸는 소박한 집, 보헤미안 고양이 같은 사랑스러운 딸은 어느새 세상을 사냥하는 기술을 익혔는지 낯선 땅에서 공부하는 방법들을 자랑삼아 말했다. 미국에서 와서 합류한 아들내외와 손자를 비롯한 온가족이 함께한 꿈같은 한 달을 보냈다. 알프스의 설경과 호수, 이름 모를 야생화. 그리고 유럽의 고풍스런 도시들이 주는 매력과 삶의 모습들을 음미하고 체험한 한 달은 어느새 과거로 달아나 버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심술궂은 장마에 텃밭의 고추들은 탄저병에 죽어갔고 옥수수는 검은 곰팡이를 문신처럼 새겨 넣고 있었다. 풍성한 밥상은 사라졌다. 한 달 동안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한 텃밭이 마치 자해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여름은 그렇게 서둘러 가버리고 어느덧 가을을 맞았다. 가을은 잔인했다. 기름기 낀 뱃속에 암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사실에 가을을 누릴 여유조차 없었다. 기어코 암세포는 선전포고를 해왔다. 놈을 잡으려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의료진들의 눈과 손이 갈피갈피 내 몸을 뒤졌다. 마침내 심판전원의 판정승. 신은 감사하게도 내 손을 들어주었다.

 

  지난여름과 가을을 돌이키는 동안 음악은 아홉 번째 트랙 ‘캐논 변주곡’으로 접어든다. 무거운 듯 그러나 장엄하게, 때론 빗방울이 떨어져 어디론가 굴러갈 것 같은 경쾌하고 변화무쌍한 소리. 내 지난 일 년의 삶을 재생하고 있다. 차는 자동항법장치를 걸어놓은 비행기마냥 어느덧 익숙한 남한강변에 닿는다.

 

  초겨울 강변에는 잔설처럼 보이는 물 억새가 하얀 손을 흔들며 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작별을 고하고, 산이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물가엔 작은 새들이 부산한 몸짓으로 강을 간질이고 있다. 강이 꽝꽝 문을 닫기 전에 부지런히 제 흔적들을 새겨놓기라도 하려는 듯.


  열 두곡을 넘긴 <december>는 다시 첫 트랙 ‘감사’로 돌아가고 있다. 차는 양평대교를 건너 드디어 양수리로 향한다. 이따금 바람이 고요한 강에 물주름을 그려 넣고 햇살은 수많은 은비늘을 박아 넣는다. 드문드문 눈발이 멈추고, 서녘의 태양이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눈이 부신 두물머리, 드라이브의 종착지다. 예까지 오는 동안 앨범은 두 바퀴를 돌았다. 감사와 기쁨, 눈 내리는 밤의 종소리와 캐럴에 이어 마지막 곡 ‘평화’가 연주될 차례. 나는 차에서 내려 두물머리 끝자락에서 심호흡을 한다. 저녁 강바람이 제법 매섭다. 불현듯 산골마을의 겨울밤이 떠올랐다.

 

  눈보라치던 날, 나는 잽싸게 누나의 치마폭에 몸을 숨겼다. 금세 얼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고, 예배당 종소리보다 한 박자 빠른 누나의 종종걸음에 도장을 찍듯 따라 걸었다. 예배당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크리스마스 날 부를 성탄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슥해진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나의 손을 잡고 큰소리로 캐럴을 부르며 어둠을 쫒아냈었다. 그때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노래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에 실려 고요한 강의 물안개로 곱게 퍼져가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유연하게 흘러가는 물은 그대로 음악이 된다. 이미 정해진 순서와 속도에 따라 열두 곡은 반복해 흐르지만,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흘러가버리는 것을 붙잡으려 들지 말라!’

 

  강물이 타이르는 소리를 듣는다. 마지막 곡 ‘평화’의 선율이 청량하다. 페달을 밟는 발에 서서히 힘이 주어지고 전조등이 앞길을 환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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