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경북문화체험 은상]
외나무 다리
강기석
풍경이 되는 다리가 있다. 강물 따라 흐르고, 바람 따라 흔들리다가 문득 머물러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다리가 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오래 묻어 둔 감성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삶의 형식이며,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서정이다.
마을이 다리를 만들고, 다리가 마을을 불러일으킨다. 다리는 어느덧 환유가 되고 상징이 된다. 다리로 마을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세상과 통한다. 나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허심탄회하게 연다.
다리는 낮다. 마을보다 낮고, 방죽보다 낮고, 그리고 모래밭보다 낮다. 강물이 손을 뻗으면 스칠 만큼 낮다. 낮다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관계의 시작이며 타인에 대한 존경이다. 나를 통해 타인을 드러낸다. 타자의 존재를 건립한다. 새는 더 힘차게 날고, 기와지붕은 더욱 빛나고, 그리고 참나무 숲은 한층 푸르다.
방죽에 도달한 마을길은 다리와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래밭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진다. 다리는 강보다 짧다. 다리는 강을 통째로 차지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만 소유한다. 소박하고 담백하다. 절제되어 지루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의 욕심 없는 영혼이다.
다리는 소리 가운데 있다. 한낮에는 옥수수 잎사귀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나고, 밤에는 별이 반짝이는 소리가 난다. 물살이 빠른 곳에서는 볼이 붉은 소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나고, 부채처럼 펼쳐진 물길에서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난다. 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를 만든다.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남길 외마디 소리를 준비한다.
무던히 견딘다. 다리는 자신을 밟고 지나가는 무수한 발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구름같이 푹신한 아이들의 발길, 뾰족구두를 신은 숙녀의 화려한 발길, 방황하는 길손의 무거운 발길, 기품 있는 양반의 느릿느릿한 발길, 그리고 술 취한 장꾼의 비틀거리는 발길질을 일일이 감당한다. 밟히기 위해 태어난 운명을 원망한 적이 없다. 불평 없이 어긋난 관절을 추스르고, 으깨진 얼굴을 가다듬는다.
새로 놓은 다리라고 해서 나이가 새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 만든 사람들의 뜻이 이어지고 있다면 다리는 아직 변한 것이 아니다. 재료와 솜씨가 그대로 쓰이고, 모습과 이름마저 그대로라면 아직 바뀐 것이 아니다. 왕이 바뀌어도 왕조는 변하지 않는다. 다리의 나이는 처음 놓은 다리부터 센다. 새로 놓은 다리는 오래된 다리이다.
물이 깊어질수록 다리의 폭이 좁게 느껴진다. 얕은 물에서는 편안하던 마음이 깊은 물에서는 조금씩 불편하다. 물이 더욱 깊고 물살마저 센 곳에서는 곧장 앞으로 떨어질 것 같아 눈앞이 아득하다. 위험에 직면하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안과 공포의 기제가 작동한다. 포기하라는 신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외나무나리에 오른다.
호기심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고 싶은 욕망이 도전을 부추긴다. 물에 빠져서 일어날 수 있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기대가 더 크면 용기를 낸다. 사노라면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원하는 것은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다.
다리는 두어 구비 휘었다. 퉁소 소리에 흔들리는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시작하여, 사군자를 치는 선비의 손길처럼 날렵하게 꺾으며 휘달리다가,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물새 날갯짓처럼 유려하게 마무리된다. 조금 덜 휘었으면 떫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휘었으면 난삽했을지도 모른다. 알맞게 발효된 장단이며, 붓질이며, 그리고 율동이다.
휘어진 것은 조금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은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정답을 두고 저만치서 아직 바라봄이다. 여유는 유연성, 다양성, 다원성, 그리고 복합성의 사유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성찰하는 계기다. 숙고하는 삶이다.
다리는 산과 들과 강을 묶고 푼다. 혼돈과 통일, 수렴과 발산, 그리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반복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다리는 산과 들과 강이 거기 그렇게 있어야 하는 까닭을 새롭게 말한다. 사람들은 다리가 창조한 의미 속에서 놀이를 통하여 가치를 공유하고, 아담의 언어를 찾아 시를 쓰고, 그리고 추억과 희망을 노래 부른다. 쓸쓸하거나 혹은 한적했던 마을이 관객들로 소란해지고, 밋밋한 일상에 하나 둘 매듭이 생긴다.
계절도 외나무다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계절은 다른 숨소리와 다른 맥박으로 왔다가 간다. 다리에서 다리를 바라보다가 다리 속으로 들어가면 계절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하얀 그림자가 보인다.
봄에는 다리를 걸터앉은 나른한 여심이 보인다. 여인은 바람에 실려 오는 꽃의 향기를 맡으며 물속을 살핀다. 지나가던 물고기의 눈이 여인의 눈과 마주친다. 여인은 물고기 눈 속으로 들어가 강을 거슬러 도원을 향한다.
여름에는 소나기 속으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달음박질을 한다. 요란스러운 천둥과 번개를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다리를 건넌다.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두려움 없는 그들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물이 불어나서 다리가 끊겨도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가을에는 안개를 따라 귀향하는 초로의 신사를 만난다. 어깨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처져 있고, 눈은 회한으로 젖어 있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가더라도 반겨줄 사람은 없다. 기어이 돌아와야 하는 사연을 묻지 않는다.
겨울에는 다리가 강을 잡고 놓지 않는다. 누구라도 혼자서는 흑백이 연출하는 차가운 논리에 맞서기 어렵다. 서로 몸을 맞대고 침묵으로 저항한다. 누가 이 적막을 깨야 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도원으로 간 여인이 궁금하다.
무섬마을은 나의 애인이다. 남몰래 숨겨두고 혼자 그리워한다. 삶의 비용이 가혹할 때 더욱 간절하다. 그곳에 외나무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 사유를 펌프질해 주는 외나무다리가 거기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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