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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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색깔을 분별할 수 없다면 어떨까? 그 색이 그 색이라서, 네 편 내 편으로 마음이 나뉠 이유도 없어질까. 시각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인간은 색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눈을 뜨면 맞닥뜨리는 색. 색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색으로 마감한다. 상대의 눈빛이나 얼굴빛으로 마음을 읽고, 색깔을 얼굴에 바르고, 몸에 입고 걸친다. 이처럼 색깔의 위력은 지대해서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색을 먹는다. 밥상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것도 색깔이다. 붉은 초장과 녹색의 브로콜리, 노릇함과 연두와 흰색이 조화를 이룬 양배추, 흰자위와 노른자가 어우러진 달걀부침과 쌀밥과 국까지, 조리방법은 달라도 눈과 혀가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색이다. 건강에 좋다고, 잡곡밥이 당당히 공신반열에 올랐지만 흰밥처럼 색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없다. 바삭한 김을 올려놓아도, 각종 채소를 곁들이거나 김치를 얹어도 군침을 돌게 한다. 이처럼 색깔과 식욕은 비례해서 영양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부추기면서 탐식과 미식을 넘어 쾌락의 경지로 치닫고 있다.
빨강셔츠와 청색재킷을 골랐다. 빨강과 파랑은, 검은 계열의 정장과 회색바지와 감색 재킷 같은 튀지 않는 색을 선호한 내게 파격의 색깔이었다. 제복과 정장에 길들여진 권위를 일시에 내려놓은 반란, 그러나 갑자기 빨강의 외향적이고 충동적이거나 파랑의 독선적인 기질로 변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열정적이고 싶은 욕구, 활기차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컸다. 그동안 내 몸은 무채색에 얼마나 따분해했을까. 색깔이 달라지고 패션이 달라지자 신발의 색도 바꾸어야만 했다. 캐주얼차림에 검은 구두는 센스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쉬워서 가벼운 느낌의 갈색 신발로 바꾸었다.
“밝고 멋져요. 훨씬 젊어 보이네요.”
그동안 멀게만 느껴지던 차가움이 확 달아나는 것 같다는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고리타분한 관념을 벗어버린 색깔의 반란을 굳이 진압할 마음이 없어진다.
정치가들은 옷 색깔에 메시지를 담기를 좋아한다. 그동안 남성 대통령 일색이었던 탓에 옷 색깔에 그다지 눈이 가지 않았다. 넥타이나 셔츠 색으로 그 뜻을 헤아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첫 여성 대통령의 등장은 눈을 즐겁게 한다. 대통령의 옷 색깔은 그날의 메시지가 담겨있어 경제 활성화와 같은 소망의 행보일 때는 빨강이나 연노랑 같은 밝은 색깔의 옷으로, 상황이 엄중할 때는 무채색 계열을, 외빈 접견이나 만찬장에서는 초록색 정장이나 붉은 꽃무늬 한복을 입는다. 어떤 의상인지 무슨 색깔을 입는지가 주요 관심으로 떠오른 것이니, 확실히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색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간혹 상대 정당의 대표적인 색을 자신의 넥타이에 표현해 냄으로써 상생과 화합의 메시지를 담아내길 좋아한다. 상대를 배려하고 있다는 의중이기도 하다.
자동차 색깔에서도 그 사람의 성향은 드러난다. 대개 남자들은 중후한 검정계열을, 여성은 남성에 비해 밝은 색을 선호한다. 그러나 대부분 화이트, 블랙, 실버, 그레이 같은 무채색이 주류를 이룬다. 내 차의 색상도 그레이다. 삼십여 년 동안 여섯 번 차를 바꾸면서 달라진 색이다. 검정에서 그레이까지 무려 삼십 년이 걸린 셈, 빨강셔츠에 비해 파격까진 아니어도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다. 왜 유독 검정색을 고집했던가. 그것은 직업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고 남성의 우월적 권위가 작동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여동생이 차를 바꾸면서 색상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어떤 색을 맘에 두고 있는지 먼저 말해보라고 했다.
“빨강”
거침없는 대답으로 보아 이미 작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안돼”
“왜?”
“눈에 띄는 색이잖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어. 아줌마가 물정 없이……”
빨강의 유혹, 그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 낸 편견이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내 속마음이었다. 얼마 후 동생은 흰색 신형 프라이드를 타고 나타났다. 그 선택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먼지를 털어주고 관리해야하는 색. 동생의 깔끔함을 짐작하게 했다.
군 훈련 때 벌이던 공방전을 떠올려보면, 빨강 대 파랑이 벌이는 색의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늘 파랑이었다. 쌍방으로 나뉜 훈련부대에 아군은 파란 띠를, 적군인 대항군은 빨간 띠를 철모에 둘러 식별했고, 아군인 청군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극좌파 혁명가들의 횡포를 연상하는 빨강에 비해 색의 상징성이 약한 파랑의 승리, 그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결과이다. 빨강은 붉은 혁명과 맞물리면서 사상과 이념을 덧씌워 색깔론을 낳았고, 그것은 종종 이성보다 감성을 선동하는 공세적 효과를 누렸다. 색깔을 이용해 색깔을 모독한 무례다.
아파트 단지 옆으로 고속화도로가 났다. 주민들은 거기서부터 마을까지 이르는 인터체인지를 만들어 달라고 성토하기 시작했다. 농악대가 동원되고 붉은 띠까지 준비되었다. 내심 내키지 않은 차에 마침 한 사람이 나섰다. 우리의 의사를 알리는 것은 좋으나, 붉은 머리띠는 못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찬반의사를 물은 결과 머리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붉은 색이 갖는 이미지, 그것도 머리띠가 주는 '투쟁'의 의미에서 벗어나고 싶은 때문이었다. 다행히 투쟁이나 반발의 행동을 보이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며칠 전 인도의 커리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다. 강황의 짙은 노랑은 식감을 자극해서 TV를 시청하는 동안 입에서 커리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눈에 띄는 노랑, 맛있는 노랑이 때로 단체가 될 때 ‘진보’ 혹은 특정계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안정과 번영을 가장 고귀하게 여겨 깨달은 자의 색으로 통하는 노랑이 갖는 또 다른 아이러니다. 내가 노란 리본을 보란 듯이 가슴에 달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색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본연의 색깔을 왜곡하거나 훼손하는 색깔론은 멀리하지만, 매일매일 색으로 말하고 색깔을 느끼는 나는 여전히 색에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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