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종이배 / 이복희

희라킴 2016. 9. 19. 17:14



종이배


                                                                                                                                       이복희


 오래 전이었어요. 볼 일이 있어 인천에 갔습니다. 마침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듯, 후보들의 벽보가 여기저기 붙어 있더군요. 내가 사는 곳도 아니고 선거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어 그냥 지나쳤어요. 그랬는데 왜 하필 그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었기에 얼른 약력을 살펴봤지요. 역시 그 사람이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자세히 봤습니다. 주책없이 가슴이 콩닥거리더군요. 선명히 살아나는 한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지요.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어요. 내가 일하던 대학의 사무실 창문 너머로 가끔 지나가는 그를 눈여겨보게 된 것이 말입니다. 학교 뒷문으로 이어지는 샛길에는 잡초가 무성했지요. 어른 무릎 높이만큼 자란 풀숲을 헤치며 그가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덥수룩한 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한 번씩 쓸어 올리지요. 나는 얼른 창가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마치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그가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곤 했어요.

 

 교정에서도, 복도를 오가다가, 또는 계단 모퉁이를 돌다가도 그를 보았습니다. 물론 그는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지요. 나는 그의 이름이나 출신학교, 전공 정도는 알 수 있는 교직원이었고 그는 학생이었으니까요. 굳이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저 그의 서늘한 이마와 시린 눈빛을 보기만 해도 좋았거든요. 스무 살 초반은 그런 나이지 않겠어요. 검게 물들인 군복점퍼의 깃을 세우고 생각이 많은 얼굴로 내 곁을 스쳐 가면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만난 듯 가슴이 설레곤 했어요.

 

 그는 내게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감미로운 음악, 또는 서정시가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요. 그뿐이었어요. 혹시 짝사랑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만, 불꽃을 사르기에는 내 속에 이는 바람이 좀 약했던 것 같아요. 그저 내 시간의 물살 위에서 반짝이는 윤슬 같은 것이었지요.

 

 그곳을 떠난 뒤 얼마 후, 사회인이 된 그를 먼발치로 한 번 보았네요. 시청 앞 버스 정류장이었지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손에는 돌돌 만 잡지를 들고 있더군요. 분위기로 봐서 잡지사나 신문사 기자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은 여전히 지적으로 보여 멋있었고 몰래 바라보는 느낌도 역시 좋았어요. 거기까지의 내 기억이 터무니없이 윤색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런데 그날 본 사진 속, 초로의 남자, 그 얼굴에서는 아무런 기억도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남을 새라 착 붙여 넘긴 올백의 헤어스타일은 그렇다 쳐요. 거만하고 탁한 눈빛에서 옛날의 느낌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군요. 약력을 다시 꼼꼼히 읽어봤어요. 그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그란 말인가?'

비록 사진 속의 얼굴이라 해도 말입니다. 내 마음을 뒤흔들던 그 눈빛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다시 떠올려도 세월의 저편에서 단번에 살아나는 그 눈빛은 여전한데 한 장의 사진으로 벽에 붙어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옛날, 데모대의 선봉장을 맡아 했던 그 사람,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은 먼 데 있고 맑고 푸르던 분위기, 허름한 잠바 차림의 아름다운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요? 돌아서는 발길에 힘이 좀 빠지는 것 같다니 혼자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지요.

 

 어쩌면 옛날의 그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허상이었던 걸까요. 하긴 벽보 속의 얼굴도 진정한 그의 모습이 아닐지 모르지요. 실망이라니요. 그 사람의 모습과 삶을 멋대로 윤색했을 지도 모를 내 잘못인 게지요.


 내 젊은 날의 유치함이랄지 세월의 힘이랄지뭐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초원의 빛도 아니고 꽃의 영광도 아닌 기억 하나 스러지는데 왜 그렇게 서운하던지요. 보잘 것 없지만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더군요. 그래서 마음으로 작은 종이배 하나 접었습니다. 그것을 세월의 강에 띄워 보냅니다. 물결은 이미 반짝이지 않았고 조그만 종이배는 흔들리며 멀어집니다. 지나간 시간의 모든 덧없음을 실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 저 종이배. 걸핏하면 흔들리는 나를 꼭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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