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저녁 노을 / 이정림

희라킴 2016. 7. 17. 08:33




저녁 노을


                                                                                                                                       이정림


  아침 여덟 시, 버스에 앉아 강의 시간에 늦을까봐 시계를 들여다본다. 일분 일초를 다투는 이 시각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신문을 펼쳐 볼 여유가 없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시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눈으로는 길이 막힐까봐 조바심을 치며 밖을 내다본다.

 차가 골목길을 한참 누비다가 일직선의 중앙로로 들어서면 시야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다. 아침 햇살이 홍수처럼 버스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때문이다. 맑고 여린 그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가슴을 펴며 태양의 싱그러운 정기(精氣)를 힘껏 들이마신다.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아침해는 인생의 청사진을 앞에 놓은 젊은이와 같다. 젊은이는 그 백지에 때묻지 않은 꿈과 희망을 그려 넣으리라. 인생의 아침에 불가능이라든지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젊은이가 아닐 것이다.

 아침해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서 새삼 내가 오후에 처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지 저녁 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날, 오후 다섯 시가 넘어 베란다에 나가면, 해가 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멀리 한강 너머에서 붉은 난황(卵黃) 같은 저녁 해가 찬란하게 빛살을 뿜으며 스러지는 광경은 나를 늘 그 자리에 못박히게 한다. 기도를 모르는 손이지만 합장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일몰(日沒),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노을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 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진다. 그리고 여운처럼 노을이 길게 깔린다. 화창한 날엔 그 노을이 더없이 황홀하지만, 구름이 낀 날에도 그 무채색 하늘에 노을이 비칠 때가 있다. 안개가 낀 밤거리에 가로등의 빨간 불빛이 고혹적이듯이, 회색 구름으로 덮인 하늘의 주홍빛 노을은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나는 그 회색과 주홍빛에서 인생의 명암을 생각하며, 하루의 종장(終章)을 숙연한 자세로 맞는다.

 흐린 날과도 같은 인생에서도 황혼이 아름다우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삶이 누구에게나 화창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흐린 날의 그 노을을 더욱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춥고 궂은 날이 많았어도 노년에는 마음 넉넉하게 여생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때로 우리를 감동케 한다. 안 먹고 안 입으며 평생 모은 재산을 학교의 장학금으로 내놓은 젓갈 할머니, 돈이 없어 생목숨을 잃는 젊은이들이 없도록 대학병원에 전 재산을 쾌척한 옷 장사 할머니―그런 분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본래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겐 아침해가 희망의 상징이었던 것이 아니라 가난과 절망의 시작이었다. 점심을 굶으며 또 거친 일에 손등이 터지며 티끌 모으듯 재산을 모은 할머니들, 그들의 부(富)는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값졌다. 이제부터 그들은 그 지긋지긋했던 가난을 털어 버리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도 비우고 주머니도 비웠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멋진 만년(晩年)의 그림을 그리도록 유도했을까.

  "내가 돈을 번 것은 사회와 하느님 덕분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돈을 소유했을 뿐이고 이제 그 돈은 당연히 사회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철학자가 이보다 더 훌륭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분들은 식자(識者)의 머리로써가 아니라, 마음을 비운 무욕(無慾)과 타인에 대한 사랑 속에서 이런 멋진 철학을 깨우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노년을 회색에서 아름다운 빛으로 바꾼 할머니들, 그들은 버림으로써 많은 것을 얻었다. 나중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 한다면, 이들보다 더 큰 승리자가 또 어디 있으랴.

 떠오르는 해는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서녘 하늘을 아름답고도 장엄하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의 종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숱한 오류, 숱한 실패, 숱한 잘못, 이 후회와 부끄러움을 깨끗이 지워 버릴 수 있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일흔여섯 살의 지미 카터가 사랑과 봉사로 실패한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지워가듯이, 나 또한 이기(利己)의 너울을 벗고 타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면, 내 노년에서도 잿빛을 거두워낼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저녁 해를 떠올린다. 그 낙조(落照)가 물들일 아름다운 저녁 노을, 그것은 내 마지막 욕심이자 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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