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수필 백화점 / 장금식

희라킴 2016. 6. 12. 09:13


수필 백화점

장금식

 

  활자로 된 물건만 잔뜩 진열되어 있다. 수필 백화점이다. 서른 개도 넘는 백화점 중 어느 곳에 가야할지 고민하다가 명품이 많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곳이다.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글은 안 되고 꺼리도 없어 명품하나 살까 해서 온 게다.


  오긴 왔는데 명품을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행하는 디자인, 믿을만한 재료, 나에게 어울리는지, 고객들로부터 평점은 잘 받는지. 나름대로 안목과 나만의 골드 포인트가 필요하다. 품격 있으면서 살짝 틔는 것, 나이보다 좀 더 젊게 보이면서 개성이 있는 것, 너저분하지 않고 깔끔한 걸로 고를 수 있을까.


  1층이다. 논설문이나 전기문 같은 것이 놓여있다. 부드러운 소파가 아닌 시멘트 바닥처럼 차갑고 건조한 공간. 칼럼이나 소고, 논문으로 둘러싸인 대학도서관 같은 냄새가 난다. 읽기가 어려운지, 현대인의 기호에 맞지 않아 그런지 매출이 낮은가보다. 몽땅 떨이, 재고정리, 특가세일, 바로바로 즉각 배송 등 얼굴이 화끈거리고 난감한 단어들이 난무하다. ‘헌것 다오, 새것 줄게,’와 같은 보상판매도 있다. 싼 게 비지떡인줄 알면서도 이런 단어들에 흔들린다. 그러나 곧 백화점에서 할인점으로 내 몰리면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지금 살 필요가 있을까. 얼른 발걸음을 2층으로 옮긴다.


  분위기가 왠지 표정 없는 연기를 보는 듯 뜨뜻미지근하다. 밋셀러니(Miscellany)식 신변잡기나 편지글, 일기문, ‘글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글을 만든다.’와 같은 이미 많이 봐왔던 평문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쉽게 쓰여 읽기는 편하나 민무늬 티셔츠를 입은 느낌이라, 글쎄? 아무래도 다른 층 물건에 덤으로 끼워 팔기의 운명에 놓일 조짐이 보인다.


  판매직원의 눈치를 보며 살짝 빠져 나온다. 마음에 드는 수필 찾기가 묵언수행 순례길 가는 것만큼 힘들다. 3층은 리얼한 체험관이다. 소비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아프다. 기쁘다. 슬프다. 괴롭다. 화가 난다. 놀랍다. 두렵다. 지루하다. 우울하다’ 등등의 단어조각들로 퍼즐 맞추기 하러온 체험학습장 같다. 유명인의 기행이나 경험담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 판매실적 부진으로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역력하다. 꼴찌를 벗어나 순위가 오르고 고객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매출성장에 시너지 효과를 내기위해 시장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체험만이 중요하지 않고 ‘고객감동’이라는 단어가 붉게 밑줄쳐져있다. 신선함이 없다는 주제넘은 생각에 3층도 아이쇼핑만으로 건너뛴다.


 다리가 아프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가는 거 아닐까. 보통 백화점은 1층에 명품관이 있어 돈만 있으면 금방 사기 쉬운데 고도의 정신세계가 담긴 물건 구하기가 하늘에 있는 별 따기만큼 어렵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어야할 덴데. 서둘러 4층.


 인기 있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이 맨 앞줄에서 ‘나 좀 봐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름에 털목도리와 털장갑을 끼고 부츠를 신은 여자,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그림인데 나무가 바람을 흔든다고 써 놓은 글귀, 태양의 위치에 따라 물빛이 다른 바다, 손바닥만 한 미니 사이즈 상품들이 한 문장으로, 한 단어로 멋진 스카프 하나만 둘렀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인기대박,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라 배달도 안 되는 대신 품질 보장, 그것도 원단 품질보장이라. 꿈같은 얘기다. 연륜과 기교는 역시 실력에 비례하는 법. 대세를 피해가지는 않았다.


 머리카락 흐트러진 여인을 보고 왠지 조신하다고 말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서양식 멋진 카페에 앉아있는 듯해 기분이 좋다. 특이한 발상과 낯선 공간 같다.


 돌아 나오는 길목에 엄지를 치켜 올린 그림까지. 화려하게 포장된 물건들도 가득, 구미가 당긴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순간, 아차! 노련한 작가가 아닌 내가 이런 상품을 내어놓으면 분명 베꼈다고 되돌려 보내거나 신용을 잃어 납품금지라는 딱지를 받게 될 텐데.


 반품 잘해주는 백화점은 좋은 이미지로 광고가 되겠지만 수필백화점에서는 반품이 한번만 있어도 표절 범죄자로 낙인 찍혀 영원히 퇴출될 수도 있으니 일단 구매보류.


 입고완료 해야 할 날짜가 목을 조른다. 사기는 사야겠는데 갈등이 생긴다. 상품을 못 만들면 납품 못하겠다고 정직하게 말해야지 작품이 무슨 물건인감. 돌려막기도 아니고 사다니, 당치도 않는 일이다.


 어쭙잖게 ㄱ백화점에 소속되어 정기적으로 글을 납품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소 뒷발질해서 운 좋게 치열한 경쟁을 뚫었을 뿐 문제는 실력. 실력이라는 게 온돌방 데워지듯 자박자박 느릿느릿 올라오는 것이라 답답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데 이참에 납품업자 자격을 반납할까. 소질도 없으면서 질질 끌어봐야 갈수록 낭패가 아니겠는가. 독자보다 수필가가 많은 요즘, 수요보다 공급과다로 이익은커녕 제살 깎아먹기라는데 나만이라도 빠져주는 게 어떨까. 그도 그러려니 어차피 물건 팔고 수수료 한 푼 못 받는데 무료로 주거나 정리 상품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폐기하거나 생산중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백화점으로 발을 옮겼던 내 뒷모습이 궁금하다. 어땠을까.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헛발질하여 찍어놓은 내 발자국을 사람들이 알아봤을까. 욕심과 능력 사이에 벌어진 큰 간격을 눈치 챘으리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기는 했는데 벗어버리지 못해 쩔쩔매는 내 뒷모습. 가벼운 능력 때문에 무거워진 욕심 쪽으로 중심축이 기울어져 있다.


 사지 말아야 되고 절필을 하는 게 맞지만 요상한 게 사람 마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럴지라도’ 노력하면 4층에 있는 것과 같은 명품을 만들어 당당히 명품코너에 내 물건을 진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을 갖는 것은 또 뭔지.


 헐렁한 옷이 몸에 딱 붙기 시작하고, 행과 행사이의 간격이 점차 좁아지고,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딱딱한 글자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그런 날. 숨이 가빠 쉼표를 여러 번 찍다가 불현듯 마침표를 찍는 그날이 오기까지, 언젠가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로 들어갈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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