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과 여우
박경주
아부지, 홍시 먹고 싶은디. 홍시 사줘. 어린 시절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배부터 고팠다. 문풍지도 떨던 삭풍이 아랫목까지 한기를 몰고 오던 겨울밤이면 아버지는 보채는 나 때문에 가게까지 꼭 다녀오셔야 했다. 빨갛게 터져가는 홍시를 사오시던 아버지. 한밤 추위보다 아버지는 자신의 호주머니가 더 외롭고 추웠을 것이다. 겨울이 깊을수록 아버지의 외상장부도 점점 두꺼워졌으리. 공책 낱장을 뜯어 만든 봉투에서 홍시 몇 알 꺼내주시던 아버지 손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먹고 자나 안 먹고 자나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디."
늘 하시는 그 말씀이 언제 들어도 재밌었다. 먹고 자나 안 먹고 자나 아침에 자고 나면 배는 똑같이 고프긴 고플 것이었다.
오래 전, 괜히 왔다 간다란 말을 남기고 입적한 스님이 있었다. 꼭 나 들으라고 한 말씀 같기도 한데. 자식 둘을 낳았다는 것, 가족을 위해 애썼다는 것, 그러다가 사십대 후반에 남편을 잃었다는 것, 결국 자신을 위해서는 이룬 게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어쩔 수 없는 나이기도 하다. 어린 날의 꿈, 기대했던 결혼 생활은 내게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아니 한으로 남았다.
산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행복을 찾아 헤맸건만…. 그래도 고생하던 그 과정이 바로 행복이었음을 요사이 깨닫게 된다. 흔해빠진 외국여행 어느 구석에도 감히 끼질 못했고,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맘 놓고 부릴 사이도 없었건만, 장성한 자식들은 이제 짝을 지어 떠난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나는 다시 결혼 전처럼 혼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날개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 그건 한편으로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어머니로서의 나의 소임이 끝났다는 것은. 그런데 또 한편으로 즐겁지 않다. 동안의 희비애락에서 돌아와 다시 홀로 된다는 것. 어차피 이럴 거라면 애초에 결혼은 왜 했더란 말인가. 먹고 자나 안 먹고 자나 똑같을 것을 그 겨울밤 홍시는 왜 먹었단 말인가.
탈무드에는 여우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포도밭의 작은 구멍을 들어가기 위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뼈만 남았을 때 포도밭에 겨우 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며칠 간 포도를 맘껏 먹다보니 살이 도로 쪄서 그 구멍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여우는 어쩔 수 없이 사흘 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기다렸다가 뼈만 남았을 때에야 겨우 포도밭의 구멍을 빠져나왔다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처럼 먹든 안 먹든 다음 날 아침, 배는 똑같이 고프다는 것, 그래도 먹어야 하는 것이 삶이었다. 그 배부른 밤, 나는 행복했으니까. 포도밭의 여우처럼.
탈무드의 여우는 바짝 마른 몸으로 포도밭을 빠져나올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의 허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포도밭을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삶이 주는 달고 신 맛을, 고난 뒤엔 행복이, 달콤함 끝엔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을 여우는 알 수 있었을까.
지금 인생의 뒤안길에 선 내 모습은 바로 포도밭의 여우와 같지 않을까. 포도밭을 꿈꾸던 젊은 날의 꿈. 사랑과 결 혼, 행복, 그리고 고난…. 너는 도대체 내게 준 게 뭐니? 나는 그 행복과 고난의 구멍을 째려본다. 들락거리기만 했지 결국 다시 혼자가 아닌가.
그렇지만 살아있다는 건 경험하는 것. 학창시절에도 직장생활에서도 전임자나 선배들은 정말 중요한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을 능가할 지도 모를 정보는 주지 않으려 한다. 아니 어쩌면 정말 중요한 마지막 그것은 스스로 알아내고 깨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 옛날 그 겨울 밤, 출출했던 내게 아버지도 정말 중요한 것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그저 먹고 자나 안 먹고 자나 아침엔 똑같다고 우회적으로만 말씀하셨을 뿐. 왜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는지를, 그럼에도 왜 먹게 놔두는지를.
이제 나는, 그날 밤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아낸 아침이 참지 못했던 아침보다 훨씬 아름답긴 아름다웠으리라. 하지만 그 밤, 그것을 먹어보았기에 그걸 느낄 수 있었으리.
포도밭의 여우처럼 몸소 체험하는 것이 삶이요, 끝없이 경험하고 노력하는 것,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게 삶일 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내가 괜히 왔다 가는 것일까.
<좋은수필>, 2010년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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