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부처님을 모시고 / 이태선

희라킴 2016. 3. 21. 08:45

부처님을 모시고

 

                                                                                                                                       이태선


 첫돌을 앞둔 손녀가 밤새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밤을 꼬박 새운 며느리가 안쓰러워 아침밥도 짓고 청소도 했다. 마루를 거의 다 닦아갈 즈음 아차 싶었다. 설거지하는 고무장갑을 끼고 마루를 닦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싶어 하던 걸레질을 마저 했다.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고무장갑을 벗어 비누로 씻고 있는데 며느리가 아이를 안고 들여다보며 한소리 했다.

 “엄마, 설거지하는 장갑 끼고 마루 닦았지예.”

 “그랬구나. 내 정신하고는.”

 “설거지하는 장갑과 마루 닦는 장갑을 구별 하셔야지예.”

 “・・・

 맞는 말이라 대답을 못한 채 장갑을 씻었다. 며느리는 계속 화장실 앞에 서서 내 행동을 지켜봤다. 무안하기도 하고 감시당하는 듯 했지만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비누로 싹싹 씻어 쓰면 된다. 설거지 할 때만 쓰잖나.”

 “그래도 그렇지예.”

 말끝에 심사가 뒤틀렸다.

 ‘뭐가 그래도 그렇지예라. 그라머 니는, 주방에 쓰는 손목아지 따로 있고 걸레질하는 손목아지 따로 있나. 쓸 때마다 병원에 가서 바꾸겠네.’

 속으로 주절거리며 장갑을 빡빡 문질러 씻었다.


 장갑을 다 씻을 때까지 며느리는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씻은 장갑을 들고 며느리를 비껴 화장실을 나오자 그만 무안했던 마음이 달아나고 스멀스멀 괘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씻은 장갑을 주방 건조대에 탁 걸쳐놓고 돌아서는데 미처 씻지 못한 빈 그릇이 싱크대 위에 수북했다.

 ‘장갑을 다시 껴?’

 그대로 주방을 나와 버렸다. 한문수업 시간이 빠듯하기도 했다. 수업시간이 늦을 것 같아 동동걸음치는 내내 속마음이 실실 비웃었다.

 “백날 배우러 다니면 뭐 하노? 비우기는커녕 채우기도 바쁜데.”

 아차 싶어 삐딱하게 뒤틀린 심사를 꼬깃꼬깃 접어 종이비행기에 태워 하늘 높이 날려 버리고 가슴속 깊이 간직한 어느 날 풍경을 슬그머니 떠올렸다.


 아들네와 따로 살 때였다. 병점에서 안양으로 한문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그날도 지하철에서 내려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등 앞에 서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팔을 높이 흔들고 있었다.

 ‘사람 많은데서 젊은 여자가 쯧쯧, 어지간이 반가운 사람이 보이나 보지.’

 신호등이 바뀌었다. 무심히 앞만 보고 횡단보도를 걸어가는데 누가 엄마.”라며 손을 잡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디가노?”

 “동영이, 놀이프로그램이 있어 백화점에 가요. 엄마 조심하시고

 “오냐, 오냐, 니도 ·”

 깜박거리는 신호등을 며느리와 동시에 쳐다보면서 손을 놓았다. 수업을 마치고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에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엄마, 전데요. 어딥니까?”

 “역 안이다.”

 “잠깐 올라오세요. 백화점에서 양산을 샀는데 빨리 드리고 싶어요.”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온다며 다음 수업 있는 날 가져가겠다고 하자 며느리는 지금 드리고 싶다며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다가오는 지하철 불빛을 봐라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퇴근시간도 아닌데 역 안이 매우 혼잡했다. 그때였다. “엄마소리에 쳐다보니 빽빽한 사람 숲 저만치서 며느리가 한 쪽 팔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팔로는 양산 쥔 손을 높이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양산을 받아들고 속으로 다짐했다.


 ‘적토마 등에 앉아 눈썹을 휘날리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던 관운장도 아닌 니가, 양산을 높이 휘두르며 사람 숲을 헤치고 달려오든 오늘의 너를 어찌 잊으리.’ 남의 자궁을 빌려 낳은 내 새끼라 대할 때마다 빌린 옷 걸친 것같이 늘 서먹하더니.

 친정 숙모님께 며느리 산후産後휴가가 끝나 아들네와 합가合家를 해야 될 것 같다고 했을 때였다.

 “어쩌려고? 부처님을 모신다는 각오가 아니면 합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저도, 그런 생각입니다만

 뜻대로 살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 숙모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두 살림을 합쳤다.


 부처님 모시는 일이야 나만 섬기러 가면되는 일방통행이지만 합가하고는 서로가 섬겨야 하는 양방통행이다. 그러느라 때로는 며느리와 가벼운 접촉사고가 생기기도 했고 꽤 심각한 충돌사고도 있었다.


 접촉사고가 더 위험한 것 같았다. 가볍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는 생기기 마련이다. 여러 번 부딪치게 되면 알게 모르게 앙금으로 남아 응어리가 된다. 가까이 있으면서 먼 당신이 아니라 껄끄러운 당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서로가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살아오면서 부처님을 모시고 산다는 생각을 깜박 잊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부처님을 모신다는 각오가 아니면 합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성정이 급해 심사가 뒤틀린다 싶으면 숙모님이 하신 말씀을 잊고 뒷감당 못할 말이 속사포처럼 튀어 나오려고 한다. 그럴 때면 부처님을 떠올린다. 사람 숲을 헤치고 양산 쥔 팔을 높이 휘두르며 엄마라고 외치며 관운장처럼 달려오던 그날의 부처님 모습을. .

 내 어찌 감이 부처님께 불경不敬을 저지르랴!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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