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길을 잃다
서 숙
고만고만한 시멘트 건물들이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란히 키 재기를 했다. 그 거리를 노후한 버스와 트럭들이 쿨룩쿨룩 해소 기침으로 헐떡이며 내빼고 나면, 꽁무니에 흙먼지와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희뿌옇게 번지는 매연 저편에는 논과 밭과 그리고 소달구지가 있었다. 이렇게 도심을 향해 뻗어 있는 서울 외곽의 아스팔트 길 이편과 저편은 불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농촌으로 확연히 모습을 달리하였다. 날림으로 세워진 도시는 어설프게 졸속을 드러내고, 풍상으로 납작 엎드린 농촌은 붉은 민둥산을 배경으로 남루를 걸쳤다.
집과 학교가 길 이편에 있는 아이들이 평소에 길 저편으로 가 보는 일은 드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여자 아이들 다섯 명은 그날 학교를 마치고 약수터가 있는 시골 길로 나가 보기로 했다. 뭔가 새로운 놀이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멀리 구릉들을 두르고 시야 가득 펼쳐진 들판에 좁고 꼬불꼬불한 수로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그 수로를 따라 벌판을 가로질러 이내 제법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을 만났다. 냇물이 흘러온 쪽으로 경사가 급한 둔덕 너머를 차지한 저수지는 짙은 초록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마침내 관악산 줄기 아래 턱에 약수터가 나타났다. 앞자락이 제법 널찍하면서도 아늑하여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에서, 아이들은 그중 가장 넓적하고 평편한 것 하나를 차지했다. 그 즈음 아이들은 연극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책가방을 한데 수북이 쌓아 놓고 그 바위를 노천극장의 간이 무대로 삼아, 「신데렐라」와 「장화홍련전」이 적당히 섞인 연극을 공연하였다.
무대를 내려와서는 논둑과 밭고랑을 헤매며 한참을 신나게 뛰어다녔건만, 들꽃을 한 움큼씩 꺾어 들었을 즈음, 종내에는 노는 것이 시들했어도 아무도 집에 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해는 아직도 한 뼘이나 남아 있었는데, 어차피 날이 저물 때까지는 누구네 집에서도 아이들을 찾지 않을 터였고, 지금 집에 가 봐야 갓난아기 동생을 업어 주든가 하는 귀찮은 일만 기다릴 것이었다.
메뚜기 사냥으로 소란스럽던 한 무리의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어딘가로 몰려가 버리고 나니 갑자기 하오의 정적이 찾아왔다. 도대체 어른들은 다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벼 이삭은 누렇게 영그는데 오늘따라 참새들도 어느 곳에서 포식을 하고 오수를 즐기는가, 간간이 서 있는 허수아비들만 무료하게 먼 산 바라기를 하고 힘없이 흔들리는 깡통 소리에 오히려 사위가 적막했다. 짧은 순간 다섯 명의 조숙한 여자 아이들은 동시에 궁리하는 눈빛이 되었다.
“우리 한번 길 잃어 볼래?”
한 소녀의 제안에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했다. 그 아이가 능선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 능선 너머 한 번도 안 가 본 곳으로 가 보자고 했다. 들풀 더미를 무슨 영예의 꽃다발쯤으로 가슴에 안고, 그들 다섯 명의 여자 아이들은 한 줄로 나란히 낯선 길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가을날 오후의 숲길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듬성듬성 성근, 그저 조용할 뿐인 산속에서, 어지간히 놀이에 지쳤는지 긴장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은 재잘거리던 것도 멈추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미지의 길을 찾아 나선 소녀들의 모험은 그런데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얼마 가지 않아 숭실대학교의 뒷마당에 당도한 것이다. 다시 그들에게 익숙한, 길 이편의 도시로 건너온 것이다.
그래도 대학 교정은 그들에게 그럭저럭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는 했으며, 마침 산책하고 있던 대학생 한 명과 말을 나누게 되었다. 그도 몹시 무료한 참이었던지, 얇은 눈꺼풀이 선량해 보였던 그는 아이들에게 썩 친절했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의 질문도 하고 그의 안내로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신학생이었던 그는 진지한 충고도 하였다. 조금 있으면 6학년인데 말만 한 처녀애들이 어디를 이렇게 쏘다니느냐, 공부를 해야지. 여자 애들은 그 말에 대놓고 시큰둥했어도, 그는 퍽 관대하여서 심심하면 다시 놀러 와라, 싱긋 웃어 주었다.
그 교정을 나올 때, 낯선 세계에 한 발 내디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막연한 기대감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래서였는지 그 길 잃기 이후 아이들은 신학생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쏘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놀이를 시작했다. 연극놀이는 아무래도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 같아서 집어치우고, 좀 더 어른스럽고 멋진 일로 여겨지는 소설 쓰기라는 새로운 놀이에 몰두하였다.
동시나 작문이 아닌 줄거리를 갖춘 글을 한 편씩 쓰기로 했는데, 능선 너머 길 잃기를 유도하였던 아이도 그의 첫 번째 소설을 시도하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유괴 사건과 삼각관계가 뒤얽힌 것으로, 소녀는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이라고 자신하였다. 열심히 쓴 것을 수업 시간 중에 아이들에게 돌려 보이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그저 말없이 빼앗아 가셨다가 나중에 돌려주셨을 뿐 어떤 꾸중도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소녀는 그런 선생님이 몹시 야속하였다. 수업 중에 딴 짓 한다고 야단을 치시더라도 글은 재미있었다는 말씀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때 아마도 내심 실망이 대단하였나 보다. 선생님에게 무시당한 소녀의 소설은 이내 주인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짧은 창작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렇게 소녀의 두 번째 길 잃기도 맥없이 끝났다.
소녀는 우물 터를 지나고 성황당 고갯길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그 다져진 황토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은 어느새 시멘트로 메워졌다. 이제는 비가 내려도 운동화에 진흙이 달라붙지 않아서 좋았다. 더구나 그 시멘트 길을 따라 시설이 훌륭한 목욕탕도 문을 열었으므로 소녀는 목욕을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이면 길바닥을 뒤덮다시피 출몰하는 지렁이들이 성가셨다. 징그럽고 싫었다. 밟을까 봐 겁을 내며 소녀는 지렁이들에게 짜증을 냈다. ‘뭣 땜에 이렇게 나와 도는 거야. 그래 봐야 땡볕에 말라 죽기밖에 더 하겠니. 그냥 편안하게 땅속에 있을 것이지. 에구, 한심한 것들.’ 지렁이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야단을 치면서 소녀도 더는 낯선 길을 찾아들어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성적순으로 각각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며,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제 소녀는 학교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초등학교 가는 길과 반대로 나 있는 쭉 뻗은 신작로로 갔다. 넓은 길은 고갯마루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 너머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눈에 안 보여도 빤한 길이었다. 그리고 일단 고갯마루에 서면 오종종하고 궁색한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신작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길에서 딱히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쉽고 편한 길을 그냥 걸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한 안테나를 거두었다. 그때 그 아이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는’, 일견 평탄할 것 같은 노정은 그저 착각일 뿐, 매일매일 노심초사하며 그다지 편안하지 않은 일상에 기대어 시간도 삶도 속절없다고 애석해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끝내 길을 잃지 못하고야 마는 자의 막막하고 울울적적한 심사만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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