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석벽려 / 박모니카

희라킴 2016. 3. 21. 08:34

 

석벽려

박모니카

 

 바람이 분다. 새벽바람은 묵언으로 다가와 소리로 머문다.

 

 어둠 속에서 저마다 내는 숨죽인 소리들이 귓속 달팽이관에 고인다. 별빛마저 잘게 부스러져 귀지처럼 쌓이는 흰 새벽. 소리 없는 발자국을 남기며 담쟁이가 바람벽을 타고 오른다. 바람이 슬적 담쟁이 몸을 밀어붙인다. 휘청 잠시 흔들릴 뿐, 담쟁이는 그냥 벽을 타고 넘는다. 담쟁이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더듬거리다가 벽 너머 퍼져 있는 햇살 한줄기를 움켜쥔다.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아침이, 놀란 듯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나는 늘 담쟁이 발톱으로부터 이렇게 하루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비켜선 이른 햇살에 윤기를 내는 담쟁이 이파리는 목욕을 갓 끝내고 나온 소녀의 피부처럼 반짝인다.

 

 종종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생의 과잉에 대책 없이 허우적댄다. 불만이 많고 잘못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담쟁이의 삶을 떠올린다. 그는 뿌리가 어디에 내려지건 자신의 몫에 불평을 할 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을 풀어내어 아름다움으로 채색할 줄 아는 것이다.

 

 두꺼운 먼지로 뒤덮인 도심 한복판 콘크리트 벽일지라도, 담쟁이는 자신의 몸을 수실 삼아 초록으로 수놓는다.

 

 골목길 허름한 사진관 뒤꼍 변소 귀퉁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린내 물컹한 어시장 시멘트벽에서도 연둣빛 꽃을 피운다.

 오소리 출몰하는 외딴집 닭장 철망을 가장 황홀한 빛깔로 물들인다.

 혼자 사는 외로운 할머니네 토담에서, 그림책처럼 말벗이 되어 준다.

 고궁의 새 단장 한 돌담을 고서화(古書化)할 줄도 안다.

 

 때로 담쟁이는 자기만의 부호로 새들을 꼬드겨 하루 종일 데리고 놀기도 한다. 어떨 땐 뼈도 없는 달팽이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면 간지러워 혼자 키득대기도 하는 것이다.

 

  맵찬 허공 중에 튀밥 터지듯 삶의 묘책을 가지고 있는 담쟁이. 생의 평지풍파를 줄기 하나만으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믿음 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단순하면서도 굳센 그 믿음이 바로 소름을 돋게 한다. 멈출 수 없는 관성이며 생명력이다. 마치 끈질긴 인간의 삶을 보는 듯하다.

 

 담쟁이가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담쟁이도 벼랑에 선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에 사느냐’는 것과 ‘어떻게 사느냐’의 치열한 고심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 선택으로 이름이 달라진다.

 

 ‘담쟁이’가 되느냐는 것과, 아니면 ‘석벽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든 벽이나 바위처럼 아무러하게 쉬운 곳을 선택하면 ‘담쟁이’인 것이고 오로지 참나무나 소나무만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 ‘석벽려’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힘이 드는 명료한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담쟁이는 독이 있어 약재로 쓸 수 없으나 ‘석벽려’는 특별한 약효를 가진다.

 

 ‘본초습유’에 석벽려는 참나무나 소나무에 있는 담쟁이 줄기로 세월을 묵인 것일수록 약효가 좋다 했다. “맛은 달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라고 했으며 “당뇨병, 관절염, 복중유괴, 어혈, 지통, 종양을 없앤다.”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와 그의 아내 석은옥. 그 부부의 삶이 문득 떠오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 맹인은 안마사를 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학문의 길을 선택한 그였다. 그도 그렇지만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부잣집 외동딸이었던 그녀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연하의 시각장애인을 남편으로 맞이한 것은 비범한 일이었다. 첫눈에 영혼이 아름다워 소중한 사람이라 여기고 주저 없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의지를 해야 하는 그가 담쟁이였다면 그의 버팀목이 되었던 참나무는 그의 아내였다.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그는 ‘석벽려’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의 선택은 신중했다.

 

 석벽려는 마음의 담금질을 무수히 했다. 서럽고 공허했던 체념의 시간들을 보내고 제 살갗을 태우고 눈물을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육신의 빈 틈새에 또 다른 생의 거푸집을 만들었다. 자신을 벼르는 작업이란 우선 ‘시각장애’라는 장벽부터 넘어서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만큼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의 자식들에게 그는 점자책으로 책 읽어 주는 아버지였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왜 자전거를 같이 탈 수 없고 공도 같이 찰 수 없느냐”고. 그때 그의 대답은 “아이야 불을 꺼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는 두 아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읽어준 후 이렇게 말했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자전거나 공은 찰 수 없지만 다른 아버지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지 않느냐?”며. 가지지 못한 한 개 때문에 가지고 있는 아홉 개를 포기하진 않는 아버지로서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석벽려는 참나무를 타고 오르는 동안 습기 차고 눅눅한 우울을 벗어던졌다. 햇빛을 받아들이고 신선한 공기만을 들이켰다. 숲이 주는 맑은 물만을 물관부로 운반했다. 햇살 같은 새소리로 그의 아침이 열리고 만종처럼 울리는 노을이 그의 저녁이 되었다. 그의 하루가 곧 참나무였다. 그의 아내 석은옥은 미국에서의 그의 학업을 위해 기꺼이 흑인 맹인 집에 들어가 가정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아내를 위해 그는 학문에 정진하고 매 순간을 이겼다.

 

 그는 담쟁이의 속성을 차츰 잊어 갔다. 참나무가 바로 그이기도 했다. 그의 채관부는 세월이라는 영양분으로 튼튼 한 줄기를 만들어 간 것이다. 자신이 선별한 것만이 자기 것이 되었다. 그의 선택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천만번 두들긴 네핌질로 비로소 자신만의 징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숲을 찾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잎도 줄기도 뿌리도 아낌없이 다 내놓았다. 석벽려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내 자신을 얻은 것이다.

 

 사람들은 장애는 시련일 뿐 극복해야 될 대상이 아니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희망’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한 아름씩 나누어 가지고 갔다.(강영우님은 미국 교육계 명사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름 앞에 ‘Honorable'이라는 명예로운 경칭을 붙일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석은옥은 시각장애인 남편뿐 아니라 두 형제들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게 했다. 하나는 법학박사로, 하나는 의학박사가 되어 한국을 빛내는 인물로 활약을 하고 있다.)

 

 물은 떨어진 곳에서 과녁을 만든다.

 담쟁이는 뿌리를 뻗는 곳에서 삶을 만든다.

 석벽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우주를 만들었다.

 그의 잎은 심장을 닮아 있다.

 

 

 

-'수필세계' 통권 41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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