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자괴(自愧)의 독백 / 김규련

희라킴 2016. 3. 21. 08:20

 

자괴(自愧)의 독백

 

 

                                                                                                                               김규련

 

 

 뜻밖의 전화가 왔다

 내가 제1회 흑구(黑鷗)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뜬금없는 소식이라 당황했다. 기쁘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했다. 허나 다음 순간 오히려 부끄러웠다.

 

 한흑구 선생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상이지만 수상 소식에 평상심을 잃고 잠시나마 흔들려서 극구 사양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사람은 연령에 따라 삶의 지표가 있다고 하리라. 40대는 불혹, 50대는 지천명, 60대는 이순, 70대는 종심이다. 한데 80대와 90대 그리고 100대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나는 나름대로 80대는 무애(無碍) 90대는무치(無恥), 100대는 접신(接神)이라 여기고 있다.

 

 나는 무애의 유역까지 흘러왔음에도 수상 소식에 걸려서 마음의 고요를 깨뜨린 것이 부끄럽다. 무엇보다 한 찰나지만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생각 '상금은 얼마나 될까.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눌 돈은 될까' 이것이 크게 부끄러웠다고 하리라.

 

 수필은 관조의 문학인가 하면 사색의 문학이고, 성찰의 문학인가 하면 고발의 문학이고, 비평의 문학인가 하면 독백의 문학이고, 기행 문학인가 하면 토로의 문학이고, 감동의 문학인가 하면 예찬의 문학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방향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작품도 창작하지 못하고 상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두보(杜甫)는 글짓기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권의 책을 읽으면 붓에 귀신이 들린 듯 글이 술술 잘 씌어질 것이다.

나는 이런 열정도 없고 공부도 없으면서 파한(破閑)의 여기(餘技)로 써 모은 수필로 큰 상을 타게 되어 부끄럽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책상 앞에 앉아 오랜 시간 공부를 해서 복사뼈가 세 번 구멍이 났다(?骨三穿)고 했다.

 

 추사(秋史) 김정희는 벼루를 갈고 갈아서 열 개나 구멍을 내고 붓은 쓰고 또 써서 천 자루나 뭉덩거렸다(磨穿十硯 禿盡千毫)고 했다.

 

 수필 창작은 학문 연찬과 서도 연마와는 달라도 그들의 정신은 본받아야 하리라. 한데도 나는 그들의 흉내도 내지 못하고 구름처럼 떠오르는 편편상(片片想)을 주워 모아 가볍게 글을 지어 상을 타게 되니 부끄럽다.

 

 수필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들춰서 비춰 주는 거울이다. 수필집을 보면 그 작가의 살아온 흔적, 품고 있는 꿈, 사고의 깊이, 감성의 순도, 지성의 날카로움, 교양의 수준, 영격 지수(靈格指數)의 높이 등,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타고난 문재(文才)에 다독, 다작, 다상량을 하면 어느 정도 수준의 수필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언제 읽어도 읽을 때마다 깊은 산사의 종소리 같은 울림이 번져 나온다. 행간에는 사상의 강물이 흘러내려 엄동의 매화 같은 암향이 묻어난다. 다 읽고 나면 잔잔한 감동이 닫힌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여운으로 길이 남는다. 이런 작품은 고결한 인품이며 탁월한 식견이며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람만이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덕망도 학식도 청순한 영혼도 없는 촌로인데 어쩌다 큰 상을 차지하게 되어 부끄럽다.

 

 옛 선지식(善知識)들은 말하기를 사람의 생명은 귀천이 따로 없고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인품은 영격 지수에 따라 축인(畜人)이 있고 범인이며 재인(才人)이 있으며 학인, 덕인, 인인(仁人)도 있다. 또 더 올라가면 달인이 있고 도인도 있으며 가장 높은 위치에 진인(眞人)이 있다고 했다.

 

 영격 지수를 높이자면 고전 읽기와 심오한 사유, 명상과 수행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내공도 쌓지 않고 상을 타게 되어 부끄럽다.

 

 젊은 시절 나는 남보다 앞서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리려고 뛰고 설치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자 마음의 창가에 세 개의 등불이 밝혀졌다. 지분(知分) 지족(知足) 지지(知止)가 그것이다. 내가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삼지(三知)의 슬기를 거스르는 것 같아 부끄럽다.

 

 대구시 남산동 한 귀퉁이에 외국인 신부 묘지가 있다. 묘지 입구에 거대한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그 기둥에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베(HODIE MIHI CRAS TIBE)라는 라틴어 명언이 음각되어 있다. 영어로는 "Today for me, Tomorrow for you"라고 번역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내 날이요, 내일은 네 날이다."

 만고의 진리가 함축된 이 명언 속에는 오늘은 내가 상을 받지만 내일은 네가 상을 타게 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순환의 원리가 이어갈수록 나의 부끄러움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바란다.

 

 임종국의 『친일 문학론 』에는 일제 치하에서 명색이 문학가라 부를 만한 사람 중에서 친일 문학에 관계하지 않은 문인은 한용운과 변영로 그리고 한흑구 등 몇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

 

 애국과 지조와 은둔의 문사 한흑구 선생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흑구문학상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 김규련 수필선집 《흔적 》(도서출판 그루, 2002) -

 

 

소목素木 김규련金奎鍊

1929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영양군, 고령군 교육장, 경상북도 교원연수원 초대 원장, 경상북도 교육위원을 지냈다.

1968년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여 영남수필문학회장, 형산수필문학회장, 한국문인협회 구미시지부장을 역임했다. 에세이21, 대구수필가협회, 수필문우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자문위원과 한국수필, 한국불교문인협회 고문으로 있으며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대상, 향토아카데미문학상, 신귀래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강마을』『거룩한 본능』『소목의 횡설수설』『높고 낮은 목소리』『즐거운 소음』 등이 있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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