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승윤
■ 서산西山
석양녘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 나보다 먼저 가는 이들이여. 수만의 잎들이여, 수만의 풀들이여, 수만의 꽃들이여. 저 세상에 먼저 가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해다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늙은 나무들이여. 내가 먼저 저 세상에 가서 그대들의 외로움 전하리라. 세상의 슬픔과 쓸쓸함을 전하리라. 저 산등의 상록수림 너머로 지는 해의 굽은 등이 보인다. 환하게 굽은 등이 보인다. 먼저 가신 이들이여, 나중에 오실 이들이여. 우리 모두 가는 길은 같지 않던가.
■ 청산靑山
청산에는 호랑이가 산다. 올무도 덫도 없는 곳에 호랑이가 산다. 산들의 연봉 너머에 자색의 산이 있고 그 산 너머 희미한 곳에 청산이 있다.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으면 그곳이 청산이련만 산 속에서 무수한 해와 달을 맞으면 어느 곳이 청산인지 알 수가 없다. 청산도 산이어서 흙과 풀이 있으려니. 그 풀밭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그곳이 바로 청산이다. 호랑이가 나를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면 그곳이 바로 청산이다. 호랑이의 포효에 내 혼이 달아나 이 세상의 비참함과 굴욕을 모두 잊는 곳, 오로지 호랑이의 두 눈만이 나를 응시하는 곳, 그곳이 바로 청산이다.
■ 공산空山
내가 사는 아파트 옆에 조그만 동산이 하나 있었다. 그 산은 봄이 되면 한 나무처럼 꽃이 피었고 가을이 되면 한 나무처럼 잎이 졌다. 그 산 위에서 구름이 피어났고, 그 산 뒤에서 달도 떠올랐다. 내가 사는 동네의 작은 동산이 구름과 달의 공장인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주민들은 그 산 둘레에 철책을 두르곤 아무도 그 산에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시내市內뿐이었다. 산에 오르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낮에는 숲처럼 보였으나 밤이 되면 그 산은 만삭의 임부처럼 더 둥글어졌다. 둥근 산이 반중력反重力의 알을 낳아 허공으로 내보냈다. 그 달에서는 산의 흙냄새가 풍겼지만, 누구도 그 산에 오를 수 없었고, 아무도 그 빈 달에 이를 수 없었다.
■ 산정山頂
매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있다. 날개 한 쪽이 석양으로 기울더니 이윽고 허공 속으로 까마득히 추락한다. 이곳은 모두 키 작은 들꽃들뿐이다. 나는 그대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대는 바람에 민감하니 바람꽃, 그대는 바늘쌈처럼 촘촘하니 바늘꽃, 그대는 볕바른 돌 위에 피었으니 돌양지라 부르기로 한다. 나는 그 풀꽃들 위에 눕는다. 바람이 분다. 구름은 나를 실어나를 것처럼 나를 덮으며 세차게 흐른다. 이젠 잊어도 좋지 않을까. 그 숱한 원한과 분노를 날려 보내도 좋지 않을까. 산정에 서 있는 사람 하나가 찢어진 깃폭처럼 펄럭이고 있다.
■ 하산下山
바람이 불다가 잔다. 잎들이 진다. 천추千秋처럼 무겁게 진다. 구름은 흰색으로 피었다가 자색으로 흩어진다. 해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지만 햇빛의 색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숲도 쉬지 않고 바뀐다. 참나무 숲에서 오리나무 숲으로, 소나무 숲에서 편백나무 숲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때마다 숲의 소리와 향기도 바뀐다. 산길은 부드러운 흙길에서 어느덧 거친 돌길로 바뀌었다. 흙을 밟다가 돌을 밟고 풀을 밟다가 뿌리를 밟는다. 어디서 발원한지 알 수 없는 계곡물이 어느덧 소沼를 이루며 작은 우주처럼 깊어 보인다. 붉은 낙엽들이 작은 행성들처럼 그 소 위를 돌고 있고, 그 깊어진 어둠 속에 나무 그림자가 신처럼 배회한다. 어쩌면 우리의 우주는 끝없이 팽창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 계곡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산길을 걷고 있는 나도 변한다. 오를 때는 푸른 청년이더니 내려갈 때는 늙은 백발이다. 무릎이 아파 몇 번이고 쉬었다 간다.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다. 해가 지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노루의 귀 사이로 청람빛 좀생이별이 뜰 것이다. 나는 집에 가야 한다. 평생을 부려먹은 몸뚱이니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 이 세상 만물이 다 돌아갈 집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산이여, 삶이여, 그대가 아무리 지상명령일지라도 나의 귀가를 막지는 못하리라
출처: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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