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정성화
우리가 얻은 첫 살림집은 양옥집 이층이었다. 그 집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전망이 좋아서였다. 방 하나에 부엌이 딸려 있는 집이지만 내려다보이는 과수원은 삼천 평이 넘었다. 이른 아침이면 사과나무 잎사귀에 반사된 은빛 햇살이 방문 앞에 모여들었고, 저녁 무렵에는 사과나무 사이로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곤 했다. 나는 가끔 건너편 과수원 끝으로 가서 우리 방을 바라보곤 했다. 큰 집 위에 살짝 얹어둔 새둥지 같은 방이었지만 우리 방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윤이 났다.
결혼하고 한 달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께서 우리의 신혼살림집을 보러 오시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혼을 해도 살림살이를 장만해 올 형편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여고생 자취방처럼 단출한 살림살이를 보여드리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당장에 텔레비전이라도 한 대 사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내 표정을 본 남편이 어깨를 안아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이라도 깨끗이 쓸어놓고 싶었다. 한참 쓸고 있는데 “얘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님이 내 앞에 서 계셨다. 어머님의 온화한 웃음을 본 순간 걱정이 싹 가시었다. 얼른 어머님의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과수원에서는 연한 분홍빛을 띤 사과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계단을 올라 방 앞에 이르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방안에 있던 냉장고가 갑자기 ‘츠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어머님은 놀라서 잠시 멈칫 하셨다. 눈치 없는 냉장고라니.
둘러볼 것도 없는 살림살이였다. 어머님은 놀라지도 서운해 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두고 가장 좋을 때이고, 장롱 대신 사과 궤짝을 놓고 살아도 좋을 때이니, 서로 의좋게 살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씩씩하게 말했다.
“어머니, 이 방은 전망이 아주 좋아요. 새소리도 많이 들리구요.”
어머님은 아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듯 빙그레 웃으셨다. 그리고는 전망 좋은 방에서 시작했으니 너희들의 앞날도 그렇게 탁 트일 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네, 어머님. 저희는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만들 겁니다.’라고 다짐했다.
어머님이 양 손에 들고 오신 보따리를 풀었다. 참기름 두 병과 볶은 참깨, 고춧가루, 말린 고사리와 무 말랭이 등, 봉지에 담긴 것들을 풀어헤치니 마치 시골장터를 옮겨놓은 듯했다. 어머님은 속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네주셨다.
“신혼살림에 텔레비전은 내가 한 대 사주마.”
얼마 전 잠시 다녀간 형님이 텔레비전이 없더라고 한 모양이다. 어머님이 그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기르는 돼지를 몇 마리 파는 것뿐이었다. 수업 준비물을 빠뜨리고 온 날, 엄마가 어떻게 아시고 그 준비물을 교실까지 갖다 주셨을 때처럼 가슴이 찡했다. 한 쪽이 다 비어있을 어머님의 돼지우리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분이었다. 시집오면서 살림살이를 전혀 해오지 않은 며느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님뿐일 것이다.
둥근 눈으로 보면 세상이 둥글어 보이고, 모난 눈으로 보자면 세상이 온통 각져 보인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곧 좋아질 거라며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던 어머님의 마음속에는 자식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방’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전망 좋은 방이란, 전망 밝아지도록 도와주는 방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방에 살면서 많은 꿈을 꾸었고, 천천히 꿈을 이루어갔다. 그 방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날 어머님은 해가 지기 전에 가야한다며 저녁밥도 들지 않고 일어나셨다. 아마 새색시에게 상 차리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겠지만 너무 완강하셔서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버스가 떠나기 전에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아가,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 너만 믿고 간다.”라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과수원 건너편 집들에서도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따라 노을이 어찌 그리도 곱던지 어머님이 조금 더 계셨더라면 함께 저 노을을 보았을 텐데 싶었다.
나는 지금도 간간이 그 방을 생각한다. 사과꽃보다 더 향기로웠던 어머니의 말씀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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