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심심하면 왜 안 되나 / 박완서

희라킴 2016. 3. 20. 13:27

 

 

 

 

심심하면 왜 안 되나 / 박완서

 

 

 

나는 사십 세에 처음으로 문단이란 데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 나이에 등단을 한다는 게 희귀한 예에 속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나이에 소설을 쓸 엄두를 냈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심심해서 글을 썼노라고 대답했다. 그게 그냥 기사화되자 뜻하지 않은 야단을 맞게 되었다. 문학이라는,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엄숙한 작업을 어떻게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느냐는 준엄한 전화 설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진 신인인 나는 말 한마디의 잘못으로 세상에 밉보이는 게 두려워 덮어놓고 사과부터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잘못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전쟁 중에 결혼해서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난 여편네가 언제 심심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을 위해 24시간 봉사해야 하는 생활로부터 어느 정도 놓여나 비로소 자기만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심심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유년의 시간이 칠십 평생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건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심해서 베개를 업고 자장가를 불렀고, 게딱지로 솥을 걸고, 모래로 밥을 짓고, 솔잎으로 국수를 말았다. 할아버지가 송도 나들이를 가신 날의 해질 무렵처럼 심심한 시간이 또 있을까. 그때 나는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재촉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사랑 툇마루 가운데 기둥을 한 팔로 감고 앉아 동구 밖 산모롱이에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밤이면 승냥이가 떼 지어 나온다는 긴등고개를 넘을 때면 무서움과 할아버지의 무사를 비는 마음으로 가슴이 오그라져 붙는 것 같다. 할아버지를 따라 동구 밖까지 다 왔는데도 산모롱이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소리개 고개쯤으로 할아버지를 후퇴시킨다. 이렇듯 내 어린 날의 심심한 시간은 내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초중고등학교 때도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은 넘치게 많았다. 심심한 시간이 넉넉해서 소설이나 시집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읽을거리까지 넉넉한 건 아니어서 정 심심할 때는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요즘 애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더러 들리는데, 심심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학교 성적과 무관한 책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그건 괜히 한번 해보는 걱정일 뿐 어른의 진심도 아니다. 아이들은 심심할 시간은커녕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돌아가는 팽이와 다름없다. 자의로 도는 팽이는 없다. 자식이 행여 한눈이라도 팔세라 온종일 미친 듯이 채찍질 해대면서 책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 박완서 산문집 『노란집』-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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