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매실의 초례청
류창희
춘설 분분한 가운데 연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 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볼록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세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 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에 둥근 달이 걸려있네
不復更喚微風至 소슬바람을 새삼 불러 무엇하랴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온 집안에 가득하다
-퇴계
주례자의 객기만 홀로 소슬바람을 불러본들.
어떤 이는 매실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항아리에 담아놓고, 밤이면 앞 베란다에 내 놓았다가 낮에는 뒤 베란다로 옮겨 검은 천으로 가려준다고 한다. 그래야 수줍음을 감추고 마음 놓고 애무를 즐겨 향기로운 매실즙이 된다나.
"하이고~! 별꼴 다 보겄네. 매실이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 그거 말짱 헛것이여. 아 그 김치항아리에 넣는 두꺼운 비닐 봉다리 안 있소. 거기다 매실과 설탕을 대충 때려 버무려 서너 겹 단단히 묶어 마루 귀탱이에 처 박아 놓았다가, 오며가며 발길질로 냅다 걷어차 보소. 뒤굴뒤굴 굴러다니며 제절루 삭는 것을. 그게 제일 맛좋은 매실즙이지. 겉멋이 뭐 필요있능겨."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환한 대낮에 길거리에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죽자. 언제 제대로 서방노릇이나 했느냐면서,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피멍이 들도록 싸우는 부부들을 보았다. 저러면서 왜 살지 싶어도 그들의 악다구니는 절절한 사랑가였다. 밤이면 상처까지 보듬어 안아주고 아침이면 배시시 웃으며 보약 달이는 아낙네들의 삶에서, 짓물러 터지고 곰삭는 진한 부부애가 샘솟는 것을, 내 어찌 알 수가 있었으리.
가끔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었다. 한지에 노르스름한 물이 배여 눅진하게 스며 올라오는 기운이 내 기분까지 무르익게 했다. 아직 날짜가 있으니 기다려야지. 두어 달이 지나 드디어 개봉박두! 가슴이 쿵쿵거린다.
봉함을 뜯었다. 매실들이 쪼글쪼글 액은 다 빠지고 씨와 껍데기만 남았다. 건더기를 다 건져냈다. 어쩜 내 인생도 요렇게 성공적일 때가 다 있다니 신통하기도 하지. 흥에 겨워 국자를 휘휘 젓는데…,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을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 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는 것이 아닌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초례청에 들여만 놓으면, 저절로 거문고와 비파가 부부의 금슬琴瑟을 연주하는 줄 알았다. 매실도 제 생긴 대로 제 사랑방식대로 다루었으니. 공연히 고매한 매화 시를 쳐다보기 민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