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어금니와 송곳니 / 최장순

희라킴 2018. 9. 13. 11:34


어금니와 송곳니

 

 

                                                                                                                                 최

 

 “우리아이 젖니 모아 놓은 거예요

여자가 소중히 보관해둔 봉지 속에서 작은 석류알들이 나왔다. 아이의 몸을 수년간 거쳐 간 체온 묻은 것들. TV속 중년여인은 기억을 만지작거리며 맑게 웃었다.

 

 실이 팽팽히 조일수록 나는 두려움을 두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감은 눈 속에 살짝 비친 누나가 긴장을 풀려는 듯 뜻 없는 말을 내뱉는 순간, 대롱대롱 공중을 날아간 앞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노래를 날개 달고 이는 지붕으로 날아갔다.

 

 미운 일곱 살, 앞니 빠진 얼굴은 막 시작된 심술과 겹쳐 못나보였다. 빠진 자리가 허전해 손으로 물건을 쓸어보듯 혀는 빈자리를 더듬었다. 어떤 기대감 혹은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지만, 지붕으로 날아간 시간은 어느새 새로운 시간을 선물했고 새싹처럼 돋은 이는 유난히 하얬다. 하나 둘 유년을 갈아치운 그 이로 수 십 년간 버티면서 얼굴의 주름만큼 치아도 변했다. 색이 변하고 잇사이가 벌어지고 벌레 먹은 것들도 생겨났다.

 

 이가 또 말썽이다. 은밀한 곳일수록 어둠과 친하다. 동굴 속에 들어앉은 비밀의 암석, 어금니가 벌레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밀인 구석에서 벌레는 제 먹이를 야금야금 갉아댄다. 활짝 웃어도 잘 드러나지 앉는 은신처를 잡은 치밀함은 통증이 올 때에야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어금니다. 치아의 기능 절반을 차지하는 만큼이나 사용빈도가 높다.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는 소와 같아서 오랜 반추에 곁들인 초식의 여유로움은 덩치를 키웠다. 내가 이만큼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어금니가 음식을 잘게 부수고 맷돌처럼 갈고 으깨어준 덕분이다. 이제껏 섭취해야할 것들을 씹지 못한 채 목구멍으로 넘겨본 적은 없다. 그런 어금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부지런히 청소해 주는 것뿐. 혹여 이방인이 들듯 이물감이 느껴지면 빼내어주고 벌레가 생기면 치료로 보완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썩은 이를 갈아내거나 치석을 제거하는 소리는 공사장의 바닥을 뚫는 소음 같아서 온몸이 다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치과에 나를 맡기는 것은 주기적인 검진으로 이를 살피고자 하는 것, 치과와 나와의 관계는 마치 악어새와 악어처럼 공생관계다.

 

 음식을 잘게 찢는 송곳니는 개에게 잘 발달되어 있어 견치犬齒로 불린다. 육식동물에게 송곳니는 무기다.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릴 때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오싹 소름을 돋게 한다. 엄포 혹은 적의다. 공포를 주기에 딱 맞는 치명적인 무기다. 사람은 잡식성이어서 송곳니의 예리함은 둔해졌다지만, 그 역할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송곳니는 어디까지나 저작咀嚼을 주로 하는 어금니의 보조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드라큘라의 이빨처럼 자랐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송곳니가 매력인 사람도 있으니 미적 기능도 겸비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적의를 표현할 때 송곳니를 드러냈다고 하는 걸 보면 독한 면이 있어서 일까, 송곳니는 충치에도 강한 모양이다.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살상무기. 물어뜯고 찢어야 직성이 풀리는 공격성은 위험천만한 정글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송곳니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성질을 드러내는 무자비다. 약점만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발리는 천박한 권력이다. 철지난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상대편 죽이기는 힘없는 밥그릇 앞에서 위세를 떨친다.

 

 몸 안에 소와 같은 순한 초식동물을, 사자 같은 육식의 맹수를 키운다면 사람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씹는다는 것은 거친 것을 순화시키는 과정이다. 음식만이겠는가, 일상에서 겪는 분노와 울분, 불안과 걱정을 씹고 또 씹어 삼키다보면 어느새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퇴근길 소주잔을 앞에 놓고 직장상사도, 힘들게 한 고객도 안주삼아 씹는다. 그러면서 잊고, 다음날 가뿐히 넥타이를 고쳐 매는 것이다. 세상의 험한 꼴을 수없이 되새김질하면서 인내와 관용의 목구멍으로 넘겨주는 어금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 송곳니라지만, 설움이나 분노, 치가 떨림을 지그시 깨물어 다음의 앙갚음과 복수를 기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서움이다. 드러나는 송곳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쩌면 어금니가 아닌가.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 송곳니와 어금니의 협업은 부부처럼, 동지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아래턱이 옆으로 움직일 때 송곳니는 턱이 움직이는 방향을 유도하면서 어금니가 닿지 않도록 한다. 송곳니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금니가 빨리 상실되고, 어금니가 상실되면 다른 이들도 쉽게 흔들린다. 또한 송곳니가 없으면 얼굴 골격이 변형된다. 잘게 찢어주는 수고가 있어 어금니는 씹고 갈고 으깰 수 있다. 극히 드믄 경우가 아니면 송곳니를 건들지 않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받쳐주고, 선두가 힘들면 잠시 뒷사람이 선두가 되는 역할.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송곳니와 어금니 역할을 해준 사람들이 있다.

 

 평화와 폭력을 함께 아우르는 치아는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 몸에 존재한다. 어쩔 수 없는 양면성이다. 하지만 인간의 숨겨진 어떤 야만도 씹는 행위의 여유 속에서 순치馴致될 수 있다. ‘빛과 어둠은 본디 한 몸이었으므로.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먹는 평화로운 초원을 입안에 지닐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