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동 / 남영숙
끝동
남영숙
자신이 건사하지 못하는 육신은 인간에겐 짐짝이다. 누구인들 그리되고 싶을까. 뜻하지 않아도 종국에는 방어할 수 없는 무기력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비극이다. 정신의 작용을 몸이 따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는 둘째 딸네 집에서 정물인 듯 존재한다. 지난해 여름 막내딸에게서 이곳으로 조용히 옮겨져 온 후 사위와의 불편한 동거중이다. 옮겨진다는 피동형은 본인의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남매를 생산하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지금 마음 놓고 생의 말미를 의탁할 곳이 없다. ‘마음 놓고’라는 표현은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대접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의미한다. 어미에 앞서 저 세상으로 가버린 외아들이 여적 곁에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나을 것인가도 생각해 보지만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인간이 가장 평안하게 보내야 할 생의 구간은 언제일까. 저 세상에 이르기 전 마지막 남은 한 소절의 삶이 아니겠는가. 이미 기울어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낡은 선체 같은 몸과 마음이다. 타인의 손을 빌어 꾸려가야 하는 구차한 삶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자식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미 많은 불편을 주고 있는 터에 그 말이 합당한가 싶긴 하다. 삶의 비루함이란 때때로 어폐 따위는 괘념치 않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초승달이 만월이 되고 다시 캄캄한 그믐달이 되듯, 한 때 나의 인생도 보름달처럼 환할 때가 있었느니. 초년의 궁핍에서 벗어나고 아이들이 잘 자라 제 몫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며느리를 맞고, 촉망 받는 사위를 넷씩이나 보았을 때 세상이 내 것인 양 하였다. 그때의 나는, 생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고단했던 내 삶에게 포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몫까지 누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는 우매함이 있다.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다. 인생의 무상함을 어찌 모르랴. 그럼에도 작금의 호황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생은 늘 뒤척이면서 흐르는 것임을 잊은 까닭이다.
현실이란 호시탐탐 인간의 등짝을 후려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삶에서 비릿한 갯내가 나곤 했지만 외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등져버린 참척의 고통이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픔을 계량화 할 수 없으니 타인이 그 고통을 어떻게 알까. 오랜 시간을 거쳐 내게 당도했던, 아늑한 향유의 시간은 찰나인 듯 스러져버렸다. 생은 다시 삼베처럼 엉성해지고 굵은 올 사이로, 내게 왔던 모든 것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건강도, 한줌의 재물도.
이제 한 뼘 남은 구차한 삶을 잇기 위해 아이들의 집을 전전하지만 나는 그들이 불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그들을 속일 뿐. 온전히 한 여식의 우산 아래로만 들어설 수 없는 것은 그들 모두 생이 조금씩 무겁기 때문이다."
천륜에서 오는 내리사랑이라 하더라도 노인의 의식 속을 맴도는 서운함이 왜 없었을 것인가. 그래도 부모인지라 속내가 표출되지 못하는 그의 상념을 유추해 본 것이다.
팔순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의 딸이 문득 말했다. “후일, 노인이 되어 내 육신을 잘 건사하지 못하면 내 발로 요양원으로 들어 갈 것이야.” 네 딸 중에서 둘째인 착한 그가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뜨악한 것이었다. 떠먹여야만 밥알이 입으로 들어가니 다른 수발이야 오죽할까. 많이 지친 듯하였다. 하루에 네 시간을 돌봐준다는 노인복지사의 출장 근무가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고 요양사는 그에게 신이 내린 천사다. 아들 없는 며느리는 요즈음의 세태로는 자식이 아니었다. 부유한 막내딸이 돌보다가 왜 나만인가 하는 바람에 거처가 둘째네로 옮겨진 것이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리지만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는 옛말은 시공을 넘나들며 유효하다.
자녀들을 지치게 하고 스스로도 자존감 상실이 임계점에 이르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이미 없다. 삶과 드잡이 하며 열심히 살아 왔을 뿐인 그 노인이 어찌하여 생의 말미가 시말서 쓰듯 그렇게 추레한 것인지. 마련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양쪽 모두 잘못이 없는 그 모녀가 서로 지쳐가는 것을 보면서 휘저어 놓은 앙금처럼 머릿속이 뿌예졌다.
언젠가는 당도해야 할 임종의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회피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일 뿐 그것은 어김없이 째깍거리며 우리 곁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잘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주요한 일인지 아주 멀리 있을 듯한 그 것이 문득, 갈기를 세우고 덤벼든다. 자존自尊을 위하여, 가족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하여 건강은 의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의 말미에 대는 아름다운 끝동,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되는 것일까. 생은 끝내 남루한 것이어서 그저 운수에 맡길 뿐인 것인가. 인간에겐 종종 계획이란 단어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때가 있으니. 공식이 없어 정답도 없다. 그저 말 없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