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권유 / 윤영
오만한 권유
윤영
텃밭 가운데 의자가 놓였다. 흰빛의 바닥과 갈색조의 네 다리가 멀쩡한 걸 보니 버려진 것은 아닌가 보다. 대부분 깨어진 항아리나 절름발이 의자나 목숨 몇 가닥 남은 화초들만이 쓰레기더미로 쌓인 풍경은 반촌에서는 익숙하다. 잡초 없이 잘 가꾸어 놓은 텃밭의 주인이고 보면 필시 저곳에 앉아 자연이 들려주는 풍경을 허투루 보내진 않았을 거야. 잠시 호미를 놓고 장갑을 벗어 놓고 흙을 만지며 앉아 쉬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혼자 추측하곤 했다. 하루 저녁 도둑 열댓 명은 드나들 법한 울타리에 봉숭아꽃이 만개하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열매 몇 개를 툭툭 건드렸더니 쏟아진다. 철없는 여자의 행동이 우스웠던지 의자가 날 지켜본다. 순간적으로 바람이 휙 불더니 종잇장이 나풀거린다. 무슨 편지인가 싶어 다가갔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경고- 먹으면 3초 안에 뒈지는 농약을 살포하였으니 그래도 드시고 싶으시면 실컷 쳐먹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이 무슨 무지막지한 말인가. 차라리 솔직한 심정을 적어 놓을 일이지. 가슴이 요동친다. 농약을 살포했으니 실컷 먹고 장수하라니 말이 되는가. 비를 몇 번 맞았는지 인쇄물은 푸르죽죽하게 번졌다. 아무리 세상 살기 싫은 요즘에 농사짓는 게 힘들긴 하지만 좀 심하지 않나. 양심이 없다면 훔쳐 먹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라는 자살 권유가 아닌가.
몇 날이 흘렀다. 산책길에서, 산행에서, 때로는 죄 없는 의자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간 날에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경고문을 이고 앉았다. 주인은 비가 내린 후에는 어김없이 새 종이에 내용을 바꾸어가며 붙였다. 그토록 무서운 정갈함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까. 비뚤어짐도 어긋남도 없이 투명 테이프를 발라 마무리까지 신경 썼음이 보인다. 갈등이 심하다. 주인이 없을 때 종잇장을 없애버릴까. 되레 나를 도둑으로 물아붙이면 어떡하지. 차라리 외면하자 싶어 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한길 건너 박꽃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의자에는 풀을 먹인 밥상보가 바람에 너울거리는 거라고 애써 생각을 돌리지만 머릿속에는 텃밭 주인이 궁금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슬프게 박꽃에 머리를 박고 코 대고 딴 짓을 했다.
사람의 고약한 심보는 어디까지를 말할까. 저주받을 단어들을 선택해서 스스로 얻고자 함은 무엇인가. 무거운 경고를 무시하고 남의 텃밭에서 훔쳐갈 수 있는 용기 또한 어디에서 나왔을까. 상충과 상반이 갈림길에서 길을 비켜주지 않는 꼴이다. 도둑고양이처럼 이슬 머금고 훔쳐간 사람들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 저렇게 무지막지한 경고문을 내 걸 수 있는 사람이나 같지 않은가. 여느 때와 같이 등나무 밑에 앉았다. 낮은 담장 너머 의자는 말이 없다. 다만 내 짐이 아닌데 왜 이렇게 무겁냐고, 사형수가 마지막 앉았던 의자인양 무거운 문구를 이고선 내가 앉은 등나무 아래를 쓸쓸히 내려다본다. 부추 잎 무성하고 취나물 새순 하루하루 다르다. 텃밭 쪽으로 지켜보는 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 공존하는 강아지풀 흔들리고 키 큰 회화나무가 넌지시 웃는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육각수 상자를 드나들고 비단뱀 같은 미끄럼틀을 빠져나온다.
저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무슨 죄인이랴. 골골이 패인 깻잎과 가지와 열무가 입이 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바다를 건너가는 항해사가 바람의 속도를 막을 수 없지만 돛으로 조절하며 방향을 바꾸어 갈 수는 있다. 농부가 싹을 틔우고 햇빛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잘 자라게 보듬어 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채 두어 평의 텃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너희 세상 오만한 권유의 문구도 관심 없다는 듯 온갖 푸성귀들이 영역을 넓혀가느라 분주하다.
혹 이런 날은 아니 올까.
텃밭 주인: 이곳은 제가 정성 들여 가꾸어 온 저의 정원 같은 텃밭입니다.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연락해주십시오.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작은 도둑; 비가 오던 날 산책길에 만난 텃밭이 정갈하여 푸성귀 몇 잎 뜯었습니다. 용서해주신다면 남은 생 그 녀석들한테 오며가며 인사하고 다니겠습니다.
아울러 깻잎 몇 포기와 탱탱한 풋고추가 의자한테 귓속말을 전하는 날까지 기대해볼까.
‘의자님 이제 좋으시겠습니다.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사라졌잖아요. 주인마님과 작은 도둑님 참 추하다고 생각했는데 진정 아름다운 사람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