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자존심에 대하여 / 정성화

희라킴 2018. 3. 5. 20:12



자존심에 대하여


                                                                                                                     정성화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일어나는 시민들의 약탈행위, 그것은 또 다른 아픈 전쟁이었다.


 지난 2년간 뉴욕에서 이라크를 대표하여 일해 온 ‘알 두리’ 대사는 알 아라비아 방송과 인터뷰를 하며, 지금 바그다드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라크 국민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패전에 대한 슬픔보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 상실이 더 가슴 아프다며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존·심

 방을 닦으며 설거지를 하며, 또 꽃에 물을 주면서 나는 내내 그 낱말에 붙들려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슬며시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하기 전(前), 교육청 모의고사를 칠 예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공부방이 별도로 없는 아이들은 이럴 때 제일 난감하다. 휴지를 뭉쳐 양쪽 귀를 틀어막고 방 한구석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장난치던 동생들이 책 위로 쏟아져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집 가까이에 같은 반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 자기 집에 와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 아이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집 뒤로 아주 넓은 농장이 딸려 있고, 집 안에 목욕탕 시설이 있었으며, 그 아이의 공부방은 우리 집 안방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살며시 들여놔 주는 과일은 상큼하고 달콤했다. 나는 친구에게 산수 문제를 설명해 주고, 암기과목의 중요한 부분에는 빨간 밑줄도 그어 주었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친구 어머니가 내게 플라스틱 양동이를 하나 내미셨다. 잘 익은 토마토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니네 집은 아이들이 많아서 참… 이거 가져 가거라.” 하셨다. 부잣집 마나님 특유의 어조였다. 우리 농장에서 딴 것인데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했더라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것을 들고 왔을 것이다. “아이들이 많아서 참…”, 그 말은 우리 집을 없는 살림에 아이만 많이 낳은 흥부네로 보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 집에도 토마토가 많이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그냥 와버렸다. 왠지 마음이 뻐근해지면서 아파 오는 듯했다. 그 아픔이 내 자존심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자존심이란 사람만의 장르는 아닌 듯하다. 굵은 빗방울이 막 떨어지기 시작할 때 확 피어 오르는 흙냄새는, 느닷없는 비의 공세에 놀란 흙바닥의 자존심 섞인 반격이다. 강가의 모래톱이 아무리 아늑해 보여도 강물은 거기에 기대어 쉬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강물이 아니라면서 모래톱을 손바닥으로 슬쩍 쓸어 보고는 그냥 흘러간다. 한눈을 팔지 않고 기대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강물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층 집의 강아지도 그랬다. 데려온 날 밤 밤새 울더라고 했다. 그 뒷날 내가 보러 갔을 때 강아지는 두 눈이 퉁퉁 부어 겨우 앞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저를 떠나 보낸 어미에 대한 원망과 낯선 곳 낯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우유에다 생선살을 비벼 주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앞발을 제 가슴팍에 딱 붙이고는 꼼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답디까’ 하는 자존심 있는 몸짓으로 보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나는 처음 만나는 아이에게 맨 먼저 “자존심 있는 사람이 되어라”고 한다. 자존심은 사람의 뼈대와 같은 것이어서 튼튼한 뼈대 위에 공부라는 살을 붙인다면 쉽게 허물어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자존심에는 신기한 ‘지렛대 효과’도 들어 있다. 학습 목표를 정해 놓은 뒤 아이의 의식(意識) 한 편에 자존심을 살짝 끼워 놓고 공부를 시키면, 아이는 공부 보따리가 아무리 무거워도 번쩍번쩍 잘 들어올리게 된다. 결과에 더 크게 놀라는 사람은 가르치는 나보다 정작 아이 본인이다. 그 때 아이에게 생겨나는 자부심과 자존심은 순수 자연산이라서인지 한결 더 단단한 것 같다.

 

 자존심에는 자기 자신이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또 그런 상처들을 이겨낼 뒷감당이 버겁다는, 이를테면 지레 겁을 먹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존심은 좋은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차단한 채 오만 방자해진다든지, 독선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쉽고, 화려했던 지난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현재의 실패를 무조건 숨기려는 성향도 띠고 있다. 또 내적 성숙을 갖추지 못한 채 번지르르한 외적 조건만 내세우는 공갈빵 스타일의 자존심도 가끔 보인다.


 산삼이 우리 몸에 좋은 이유는 오래된 것일수록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좋은 기운만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존심 속에 섞여 있는 나쁜 기운을 찾아내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가라앉혀야 될 것이다. 그리고 어깨와 목 부분에 쓸데없이 들어가 있는 힘을 빼는 일이 그 다음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과 고집이 센 사람을 이라크의 모래폭풍 속에 세워 놓을 때 누가 먼저 쓰러질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마 고집이 센 사람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그는 투과성(透過性)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된 자존심이란 옹기를 닮아서 나쁜 기운을 밖으로 밀어내고 외부와 내부의 공기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데 비해, 옹고집은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독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자존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비토(veto) 세력을 위한 의자도 미리 준비해 둔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 줄 때 자신의 자존심도 더불어 살아난다는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같은 일로 해서 두 번 꾸지람 듣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결이 상하기 때문이다. 결을 유지하려는 마음, 결을 잘 다듬으려는 마음이 바로 자존심이며 삶의 진정성(眞情性)이 아닌가 싶다.


 지금껏 나는 상대방과의 기(氣)싸움에서 이기려면 나의 자존심을 더 뾰쪽하게 벼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참된 자존심이란 창(槍)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바른 자존심은 결코 모나지 않으면서 어떤 탄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다른 이의 자존심을 먼저 헤아리고 상대방의 구겨진 자존심을 펴 줄 줄 아는 마음, 함부로 자존심을 들먹이지 않으면서도 자존심이 걸려 있는 승부에서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으며,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자존심을 깨끗이 접을 줄도 아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바로 ‘자존심을 갖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꽉 붙들고 살아도 하루가 가고,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도 하루는 간다. 어느것이 더 잘 사는 건지 애매모호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자체가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무엇이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다. 자존심이란 허방을 디디지 않게 우리들 발 아래를 비춰 주는 불빛 같은 게 아닌지.


 어느새 내 눈길은 나의 발 밑을 살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