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나는 참 행복한 사람 / 김원순

희라킴 2018. 1. 31. 12:08


나는 참 행복한 사람

 

                                                                                                                           김원순

 

 강을 가까이 두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고 강물에 비치는 사계를 바라보며 마음을 고요히 가져볼 수 있다는 것도 크나큰 행운이다. 이런 행복과 행운을 끊임없이 실어다 주는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물은 오늘도 내 곁을 변함없이 흘러간다. 한참을 가다가 뒤돌아보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제 이름을 걸고서 결코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림 없이 제 갈 길을 잃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

 

 청량한 바람과 사철 푸른 물빛을 바라본 지 벌써 스무 해가 되었다. 구겨지고 때 묻은 마음을 바람에 날려버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스치고 지나버린 눈과 손을 강물에 씻어보지만, 아직도 내 몸은 지난 여름날 아름드리 흐르던 성난 황톳물 빛이다. 세월의 강이 얼마나 더 흘러야 저 푸른 물빛을 닮을 수 있을까. 세월의 바람에 얼마나 더 부대껴야 청량한 바람 한 줄기 될 수 있을까. 흘러간 시간들을 마냥 아쉬워하는 내게 강은 함께 흘러가자며 자꾸만 손짓한다.


 강물이 출렁일 때마다 은비늘이 되어 반짝인다. 백로와 왜가리가 연신 은비늘을 콕콕 쪼아대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한두 마리 눈에 띄던 것이, 지금은 제법 식구를 늘려서 강의 풍경을 한층 낭만스럽게 그려 준다. 백로 한 마리가 몇 번 나래를 치더니 다리 건너편 쪽으로 힘차게 날아오른다. 그것은 시월 하늘에 그려 놓은 한 폭의 수묵화다. 사는 일에 서툰 내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다.


 나는 조금 전 낭만이라고 불렀던 말을 이내 거두고 싶었다. 은비늘이 반짝이는 이곳은 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전장(戰場)이기 때문이다. 힘과 힘이 맞서는 곳.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곳에서도 힘의 논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유한성과 절실한 삶의 당위성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이기에 치열한 삶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무심히 흐르는 강물은 저 혼자만 흘러가지 않는다. 작은 돌과 모래들을 데리고 함께 흐른다. 가다가 수줍은 소녀 같은 여울을 만들기도 하고, 벼랑 끝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폭포가 되어 굽이굽이 흐르고 또 흐른다. 함께 흐를 수 없는 것들은 쓰다듬어 주고 쓰러진 것들은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조용히 그리고 엄숙하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강물 속에 서 있는 마른 갈대가 되어 속내 없는 여인처럼 마냥 흔들리고 싶었다.


 바람 부는 어느 날 강가로 갔다. 강물 위를 거침없이 달리던 바람 떼들이 달빛 머금은 대금산조 한 가락을 비단처럼 풀어놓는 것이었다. 강가의 풀들은 흥겨움에 쓰러졌다 일어서고, 백로와 왜가리들도 풀숲에 모여 달빛가락에 취해 젖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강은 바람이 지나가도록 서슴없이 길을 내 주었고, 그 바람은 막무가내 가슴속을 거침없이 지나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내 몸은 악기가 되었다. 녹슨 현()을 튕겨보기도 하고 삐걱거리는 건반을 마구 눌러대다가 저만치 달아나 버리곤 했다. 어느새 가슴은 거칠고 둔탁한 소리들로 가득 차 아직도 윙윙대고 있다. 이 소리들을 백로처럼 날아오르게 하려면 얼마나 더 강가에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오늘도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강물은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순정(純情)한 강물이다. 가지 마라 붙잡아도 매정하게 달아나는 무정(無情)한 강물이며, 혼탁한 것들을 품고 흐르다 어느새 누이 같은 얼굴로 다시 흐르는 유정(有情)한 강물이다. 따뜻한 가슴끼리 이어져 흐르는 연정(戀情)한 강물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인 일인지 조용히 흐르다가 뒤돌아보며 내게 묻는다.

 “흙처럼 정직하게 살아 본 적이 있었던가.”

 “벼처럼 겸손하게 고개 숙인 적이 있었던가.”

 “바다처럼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는 흘러가는 강물만 무심히 바라본다.


 강물이 흘러간 자리엔 또 다른 강물로 채워지고 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도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듯이 이별 또한 만남의 시작임을 세월의 강이 가르쳐 준다. 팔월의 무성한 잎들도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 주느라 지금 몹시 분주하지 않은가.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들이 강물을 부드럽게 해 주듯이 마음 바닥에 뒹굴던 돌들도 내 삶을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다독여 주리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제 저 강물과 헤어져야 할 갈림길에 서 있다. 그는 남쪽으로, 나는 북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는 시월의 하늘을 한 아름 안고 떠나겠지만, 나는 황량한 바람이 되어 나그네처럼 떠나야 한다. 그러나 안녕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 또다시 만날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싶을 때 나는 강으로 간다. 강은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찾아 흐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이제 한 번 제 이름을 걸고 도도하게 흘러가 보라고. 백로의 우아한 몸짓과 치열한 삶을 닮아 보라고. 나도 이제 내 이름을 걸고 도도하게 흘러가 보고 싶다. 연약하고 모난 것들을 데리고 유유히 흘러가 보고 싶기도 하다.


 내일이 오늘이 되고 씨앗이 나무가 되는 세월, 그 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름다운 것은 맨 나중에 천천히 온다고 했으니, 행여 내게도 무언가 찾아오지 않을까. 오늘도 강가에 서서 그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슬이 보석보다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그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이 곁에 있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