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체온 / 반숙자
꽃의 체온
반숙자
인사동에는 ‘볼가’라는 찻집이 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들어서면 창가에 풀꽃들이 길손을 반겨준다. 예쁜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살며시 꽃잎을 만져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꺾고 싶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유욕이 발동하는 것일까, 꽃 앞에서 해보는 생각이지만 내가 꽃잎을 만져보는 더 큰 이유는 생화인가 조화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다.
조화의 예술이 발달하여 시각만으로는 분별이 어렵다. 조화는 꽃의 빛깔이며 모양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반면에 손끝에 닿는 촉감이 까실하고 생명성이 없다. 그러나 생화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숨소리가 손끝에 짚이는 것 같고 향내가 아스라이 다가온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일의 교감이다. 나는 그것을 일러 꽃의 체온이라 한다.
집에서 꽃을 길러보면 실감이 난다. 아침저녁 눈인사를 나누며 기르는 꽃이 생기차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농작물이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느끼는 것은 우주의 별들이 서로 교신하듯 살아있는 모든 것은 서로 교감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요즘 수정산을 오르며 우연찮게 꽃 한 송이에 반해서 회춘하고 있다.
소나무 숲길에서 엉겅퀴 꽃을 보았다. 봄도 저물어 노곤한 계절, 산길에 핀 꽃은 응달이라 그런지 빈약한 꽃대에 꽃도 한 송이뿐이다. 엉겅퀴가 산중에 핀 것도 이상하고 솔갈비가 폭신한 길가에 피어 무사한 것도 신기하다. 꽃을 처음 본 날 무릎을 꿇고 꽃술에 입술을 댔다. 순간 저절로 감기는 눈, 어떤 은밀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이 전신을 휩쌌다.
어저께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밤새워 쓴 연서를 가슴에 품고 그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조바심치는 소녀마냥 달려갔다. 누가 꺾어가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새벽마다 소나무 가지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오소리가 직접거리지 않았을까, 온갖 걱정을 하면서다.
그러다가 저만치 어제 그 자태로 있는 꽃을 보는 순간 한시름 덜어내며 또 다가앉는다. 누군가 이 꽃을 보고 세상에서 못 느끼는 기쁨을 누리고 지나갔을 사람에게 감사하고 누군가 나처럼 때묻은 입술일망정 애정을 다해 친구親口했을 사람에게 동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초록치마 보라색 저고리 한 벌로도 비할 데 없이 요조한 꽃 한 송이, 조용해서 좋다. 가만히 제자리에 있어도 우주를 가슴에 품은 저 깊은 사유의 샘. 말없이도 최상의 생명을 노래한다.
나는 이 새벽, 흑인 농화학자 카버를 생각한다. 그는 한송이 꽃에 깃든 신의 세계를 실험과 연구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 직전에 태어나 노예의 후손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검은 레오나르도’라는 별명까지 얻은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혼자서 숲을 돌아다니며 병든 식물들을 보살피고 치료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식물들을 치료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모든 꽃들과 숲속의 수많은 생물들이 제게 말을 걸어와요. 그래서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것만으로 그런 것을 배우게 돼요.”라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는 식물과 사람의 교감이 놀라워 엉겅퀴 꽃 앞에서 나도 잠시 카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카버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잠자리에 있을 때 자연으로부터 최고의 가르침을 받는다. 동트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신이 그가 할 일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자연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헬더린은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죄한 사람, 흔들리는 꽃 한 송이에서도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던가.
사람에게도 체온이 있다. 꽃잎의 촉감이 촉촉하고 부드러워야 살아있는 꽃이듯 사람도 삶의 무늬가 아롱져 있고 명암이 있어야 생명감이 느껴진다. 도인에게서 느끼는 완벽함은 경외심은 들지언정 조화처럼 거리감이 있다. 때로는 꽃잎이 찢겨 비에 젖더라도 생명성은 강렬하게 전달되고 그가 세상에 있어야 할 명분은 뚜렷해진다.
한때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정원의 꽃이 좋았다. 기왕이면 모두 우러러보고 아름답다 찬사를 들려주는 여왕 같은 인생이 부러웠다. 그러나 창살에 석양이 묻어나는 이즘에는 그런 인생도 아름답지만 저답게 살아가는, 제 운명에 충실한 야생초 같은 삶에 마음이 간다.
이웃에 풀꽃만을 찍는 사진작가가 있다. 그에게서 꽃에도 처녀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꽃도 피어나는 순간이라야 순결한 미감이 찍힌다. 일단 수정이 되고 나면 같은 꽃이지만 싱싱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풀꽃이 좋아서 혼자 산과 들을 누비며 사진을 찍다 보니 이제는 의도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다 셔터를 누른 꽃들이 예쁘게 찍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예쁘지 않는 여인이 없는 시대, 우리는 지금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형으로 미인이 될 수 있는 미의 만능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프라 윈프리 같은 개성 있고 내면이 향기로운 여인에게 열광하는 것은 아닌지.
외형만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도 비슷해지는 우리의 삶을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야생초 같은 원형질의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런 글을 쓰고 싶은 것은 나 혼자만의 욕심일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