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공기가 달라질 때 / 손훈영

희라킴 2017. 11. 4. 20:13


공기가 달라질 때 


                                                                                                                                        손훈영


 긴 연휴가 끝나고 남편이 출근을 한다. 출근가방을 챙겨주며 현관까지 배웅을 한다. 삐리리리, 현관문이 잠긴다. 기다렸다는 듯 세상을 잠근다. 혼자다.


 혼자인 것이 너무 좋은 월요일 아침이다. 연휴 동안 계속 식구들과 함께 지냈다.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가 되니 혼자인 것이 얼마나 좋은 상태인지를 절감한다.​ 나를 둘러싼 공기마저 가볍게 느껴진다. 아무런 저항 없이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이 무리 속에서 늘 즐겁다는 것은 어쩌면 심오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유머러스하고 싹싹해 항상 모임에서 환영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둑한 고민과 회색빛 허무에 점령당한 채 혼자 생각만 많은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잘돼야 예술가고 대개는 부적응자로 간주된다. 행동보다 생각이 많고 광장보다 밀실이 더 좋은 나는 분명 예술가는 아니니 그러면 부적응자인가. 스스로를 생각해보면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맞다.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자주 심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만이 가진 어떤 특수한 체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밤이었다. 문학회 행사가 있었다. 반주 음악이 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혼자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오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밤하늘은 여전히 빗물을 물고 있었다. 톡톡 얼굴에 와 닿는 빗방울이 여진처럼 남아있는 행사장의 소란을 씻어주었다. 돌연 심장 깊숙이 홀연함이 감싸들었다. 갑자기 세상의 얼굴이 바뀌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났다. 타인과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메말라가던 내 존재가 아연 활기를 띠며 생기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모임에 함께 있다 헤어져 돌아설 때면, 그 순간 매번 느껴지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느낌이랄까. 나를 에워싸고 있던 대기의 질감이 부드러운 타올천처럼 온 몸에 감겨져 온다. 주름져 있던 가슴이 폐활량 깊이 들이마신 공기로 한껏 펴진다. 몸과 마음이 경계 없이 서로에게 스며든다. 두 개의 내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느낌, 문득 세상이 조용해지는 느낌이다.


 '로리 헬고'라는 작가가 내성적인 사람에 관해 쓴 한권의 책이 있다. 모임에 나갈 때면 자주 가면을 쓰고 필요이상의 외향적 연기를 하곤 한다는 께름칙함이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게 했다. 이 책은 그동나 내가 읽은 책 중 나를 가장 잘 읽어 주는 책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나를 가장 잘 이해시켜주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 성격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마이어브릭스 성격검사(MBTI)를 토대로 한 성격테스트를 해보니 내 성격은 아주 내향적으로 나왔다. 성격은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나누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성격은 내향성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져 있었다. 떠들썩한 것이 싫고 어울려 다니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은 이유가 내 환경의 특수성으로 인한 마음의 어둠 때문인 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책에 의하면 나는 갈데 없는 내향적 인간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마음이 왜 그리 힘들고 갈등에 빠져들곤 했었던 지가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본성은 내향적인데 내향적 성격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는 외향성 쪽으로 끊임없이 바꾸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사람이란 혼자 산길을 걸으며 자신의 마음속을 하나 둘 뒤집어 펼쳐보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불화보다 자신과의 불화를 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협동보다 단독 작업에 능하고 스포트라이트보다 조용한​ 그늘이 더 편한 사람, 화려한 파티보다 코드가 비슷한 한 둘 지인들과의 소박한 담소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 자기 안에 고독을 위한 장소가 상비약처럼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지금, 나는 안과 밖이 모두 자연스럽다. 몸과 마음이 어긋남 없이 편안하다. 상반된 두 개의 감정 사이에서 참 오랫동안 갈팡질팡했다. 내내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또 하나의 마음 사이에서 자주 흔들려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는 마음과 혹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하는 자체검열은 언제나 쌍을 이루어 나를 교란시켰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는 감각이야말로 내가 나임을 일깨워주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내 존재의 특별한 감수성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를 잘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와 세상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인간상 사이에서의 갈등은 접기로 한다. 굳이 사교적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이런 나의 성격적 특성을 살려 나만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내면 깊숙이 내려 갈수록 나는 점점 더 만족스러워진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정을 분명히 알수록 지금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을 알고 안정될수록 내 주변과 ​지인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하게 된다. 혼자서만 지내면 세상에 대해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사람이 될 것 같아 불안했었는데 오히려 더 열려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니.


 호젓한 물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외진 까페에서 어둑한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대면할 때, 부드러운 귤빛​ 등 아래서 오래 된 책을 넘겨보듯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볼 때, 그 때는 바로 '숨은 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신에게 위로 받은 온전한 몸과 마음은 우리들을 두려움 없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어 타자와의 진실한 교류를 도모할 수 있게 한다.


 고독이 모자라 우리는 외롭다. 고독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타인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다. 고독이 익을수록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도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바로 고독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