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기다리며 흘러가다 / 민명자

희라킴 2017. 10. 10. 20:05


기다리며 흘러가다 


                                                                                                                                      민명자


 지하철역 출입구에서 시장으로 통하는 보도는 늘 행인과 상인들로 북적댄다. 길 한쪽에 싸구려 옷을 파는 아주머니가 서있다. 가로 형 옷걸이 달랑 2개에 티셔츠랑 바지들이 걸려 있고, 큰 글씨로 '5000원' '10000원' 이라고 쓴 가격표가 붙어 있다. 그 옆에는 가죽소품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 손지갑도 있고 혁대도 있다. 저 물건들이 무진무진 팔려 아저씨의 돈지갑들 두둑하게 채우고, 졸라맨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비라도 오는 날엔 옷장수도 혁대장수도 볼 수 없다. 제대로 된 노점도 아니고 그냥 길바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처지라 맑은 날에만 난전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앞을 지나치는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가 발길을 잡는다.

 "아주머니, 더덕 좀 사세요. 한 봉지에 오천 원이예요."

 마흔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겉껍질을 무척 정성스럽게 깐 듯, 하얀 속살을 드러낸 더덕이 투명봉지에 담긴 채 낮은 접이 의자에 놓여 있다. 한눈에 보아도 장삿길이 처음인 것 같다​. 차림새는 잠시 나들이 나온 사람처럼 단정하고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역력하다.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마음이 쓰인다. 세상에 대한 연민이 쓸데없이 깊은 것도 병이다. 지나친 연민이나 관심은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니 그저 무심한 척, 좀 넉넉하다싶을 만큼 사서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데 여인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힌다.


 아파트 입구에는 과일을 파는 트럭이 가끔 서 있었다. 운전석 뒤 짐칸에는 제철 과일이 실려 있고 과일장수는 운전석에 망연히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내가 차 뒤에 서서 과일을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반색을 하며 차에서 나오곤 했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 병색이 짙고 지쳐 보이는 노란 얼굴, 해를 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던 참에 얼마 전엔 과일 몇 가지를 사며 문득 물었다,

 "요즘 장사가 좀 어떠세요? 잘 되세요?"

 "아휴, 하도 안 돼서 그만 접을까 생각 중이에요."

 주차단속 피해가며 차 세우고 손님 기다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라 했다. 그만두면 다른 일자리라도 있는지,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며칠에 한 번씩 과일 몇 봉지 사는 것, 가게 물건보다 품질이 좀 떨어지지만 되도록이면 그 트럭의 과일을 팔아주는 것, 그 정도밖에 없는데 부질없는 질문을 했구나 싶어서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번 더 그 아저씨를 보았지만 요즘엔 통 눈에 띄질 않는다. '오늘은 혹시나'하고 살펴보지만 그 길목은 비어 있다.


 아파트 후문 쪽으로 나가는 날엔 어김없이 낯익은 풍경과 만나게 된다. 이면도로 한쪽에 개별용달, 용달화물차 몇 대가 늘 주차해 있다. 운전자들은 근처 빌딩에서 나오는 배달 일감을 기다리는 중이다. 기름 한 방울이라도 아끼려는 듯, 한여름엔 자동차 앞뒷문을 활짝​ 열어놓고 길모퉁이에서 서성이고, 한겨울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한껏 웅숭그린 채 서서 여럿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춥고 지루한 시간을 견딘다. 어떤 이는 담배를 물고 있고 또 어떤 이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큰길 택시 승강장엔 영업용 택시가 뜨끈뜨끈한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린다. 난전을 편 상인이나 길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영업용 운전자들에겐 서 있는 자리가 곧 점포다. 밥과 옷과 집을 위해 쏟는 노동은 가난하지만 숭고하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취업 합격통지서를 기다리는 젊은이,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신혼부부, 자식의 성공을 기다리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이미 떠나가 돌아올 수 없는 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 찾아주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다가 빈 방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는 노인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긴 장마를 물리칠 햇살을 기다리듯, 시대의 우울을 밀쳐내고 이상을 실현시켜줄 귀한 손님이 무지갯빛 옷을 입고 오기를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고대하는 손님이 현실적 기표든 이상적 기표든, 신이든 또 다른 우멋이든, 기다리는 이와 마음에 그려진 형상과 빛깔은 각각 다르다. 그러나 가뭄에 오시는 단비처럼,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처럼 별처럼, 그 손님의 몸엔 희망의 징표들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썼다. '고도(Godot)'는 기다림의 대명사다. 그러나 고도가 무엇인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황량한 벌판,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리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결국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


 곤고하고 허기진 이 땅에 영육의 곳간을 풍요롭게 채워줄 손님, 언제 올지도 모르고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 손님을 기다리는 건 무망無望한 일인가.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물질이어도 좋고, 정신이어도 좋다. 길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움츠린 어깨를 펴고 자주 웃을 수 있는 날을, 우리가 기다리는 손님이 높은 이상의 깃발을 펄럭이며 보무당당하게 오시어 그를 맨발로 뛰어나가 맞을 수 있는 날을, 무망 속의 희망을.


 그렇게 기다리면서,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