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에누리 / 이혜연

희라킴 2017. 10. 9. 19:27


에누리 


                                                                                                              이혜연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가지 재주는 있다고 한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듯이 아무리 못난 사람도 요모조모 살펴보면 잘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팔모를 뜯어보아도 재주라고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도 음악도 무용도 일찌감치 도중하차했고, 늦게 시작한 글쓰기마저 지지부진이다. 주부로서 살림도 썩 잘하는 편이 못 된다. 그렇다면 전공인 약장사라도 잘했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말재주가 없으니 달라는 약이나 주면 그만이오, 눈치가 없어 적당히 때려잡지도 못한다. 게다가 약 짓는 재주마저 신통치 않으니 번창하고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그 장사도 나빠진 건강 때문에 집어치운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재주가 재주요’라는 역설적인 우스갯말도 자신 있게 내뱉지 못할 것이, 가끔은 스스로도 내가 정말 무재주인지 아리송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기웃거려 본 덕분으로 사뭇 문외한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 더러 있어 그것을 재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게도 재주가 될 만한 확실한 무재주가 있음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어떤 시트콤에서였다. 주인공은 한창 물건 값 깎기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판매원은 정찰제 라며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래도 주인공은 막무가내다. 눙치기도 하고(에이, 그래도 다 깎아 주던데 뭘), 어르기도 하고(손님 많이 데리고 올게), 사정도 해보지만(깎아 줬다고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할게) 어설프기 짝이 없다. 보다 못해 동행한 장인은 제값 다 치르고 그를 재촉해 매장을 나선다. 장인에게 점수 좀 따려고 큰소리 쳤다가 스타일 구긴 셈이다. 미련이 남은 그는 다른 점포들에서 예의 그 어설픈 수법으로 에누리를 시도해보지만 매번 실패다. 잃은 점수를 만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스타일만 완전히 구기고 말았다.

 

 화면에서는 웃음소리가 난무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내 웃음의 의미는 달랐다. 그것을 눈치 챈 어머니가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래도 너보다는 낫다.”

  “뭐가?”

  “안 깎아 준다고 무안해서 울지는 않잖냐.”

  “그러네.”

 어이없다는 듯 어머니는 피식 웃으신다.

  “값 못 깎는 것도 재주는 재주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을까.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장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내 뒤꼭지에 어머니의 당부가 따랐다. “값 좀 깎아 달라고 해라.” 그런데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온 내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어머니가 묻자 봇물 터지 듯 울음을 터뜨리며 웅얼거렸다고 한다.

  “안 깎아주잖아…”

  필경 “엄마가 값 좀 깎아 달래요” 하는 아이의 말에 모지락스런 거절이 따랐던 모양이다. 그 뒤로 내게 어머니의 에누리 당부는 없어졌지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기억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에누리는 내게 고통을 넘어 두려움의 대상이다. 내가 값도 저렴하고 품질도 좋은 편이라는 남대문․동대문시장을 마다하고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을 찾는 것은 돈이 많아서도, 고급품을 선호하는 취향 때문에도 아니다. 오로지 정찰제라는 이유 한 가지에서다. 비싼 가격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무고통의 대가려니 생각하고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에누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물건 사는 즐거움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다. 시장에서도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되지 않겠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깎아야 할 곳에서 깎지 못하고 사면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안 될망정 좀 깎아 보기라도 하라고 어머니에게 퉁바리맞고 몇 차례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설픈 폼은 영락없이 그 시트콤 주인공의 몰골이요, 무안하기는 초등학교 때의 경험 그대로였다. 게다가 억센 장사꾼에게는 무서워서, 선량해 보이는 이에게는 정말로 밑질까 봐 에누리를 못하니 애당초 포기하는 것이 속 편했다. 그러다 보면 간혹 계산할 때 자진해서 깎아주는 장수도 있다. 고마운 마음이 들다가도 일순 오죽이나 한심해 보였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허둥지둥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고 만다.

 

 에누리를 못하는 것이 내 개인의 손해에 그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문우회에서 회계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 착실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선배님들이 추천을 해주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 착실함이 오히려 모임에 누를 끼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물건 값이며 식대를 치르면서 끝돈까지 착실하게 지불했던 것이다. 습관처럼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임기를 끝낸 후 첫 번째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새로 그 직책을 맡은 선배가 식사비를 치르는 것을 우연히 보다가 그만 가슴이 뜨끔해지고 말았다. 대금을 사정없이 에누리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충실했노라는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나와는 딴판으로 어머니는 흥정의 명수다. 값을 깎지 못하면 덤이라도 받아 와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어머니는 재래시장을 더 좋아한다. 노련한 어머니의 에누리 솜씨에 시샘이 나서 나는 가끔 심술을 부려 본다. 다음번에는 저 사람이 분명 어머니에게 값을 더 올려 부를 것이라고. 하지만 내 추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영악한 장사꾼은 내게 값을 더 올려 불렀고 궂은 물건도 슬쩍 끼워 넣었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하며 기찻삯까지 깎으려 들던 시골 영감의 항변처럼, 값이라는 것처럼 유동적인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있는 한 변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누리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하지만 상대를 반드시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외롭고 공허한 게임이 아니라, 절제와 균형이 요구되는 공존의 게임이다. 줄타기와 흡사한 것이라고나 할까. 해서 짜릿함과 동시에 뿌듯함이 따른다.

 

 나는 지금껏 그런 에누리의 묘미를 맛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도전과 모험을 모르는 내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흥정에 대한 공포는 가끔 내게 에누리 없이 모든 거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아마도 ‘재미없는 낙원’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보다는 비록 구경꾼이 되어 남들에게서 그 묘미를 대리 만족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에누리가 있어 훨씬 인간적인 ‘재미있는 지옥’에서 사는 편이 낫다며 억울함을 달래본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절대 에누리 할 수도, 또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수명(壽命)이다. 때가 되면 나와서 정해진 횟수만큼 울다가 어김없이 들어가야 하는 시계 속의 뻐꾸기처럼, 주어진 시간만큼씩 에누리 없이 살다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