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복숭아문학상 수필 최우수] 엄마를 닮은 복숭아 / 최부련
[제12회 복숭아문학상 최우수]
엄마를 닮은 복숭아
최부련
복사꽃이 환한 봄날 동구 밖 길에 엄마가 서 계신다.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가려는데 발이 꿈쩍 않는다. 엄마는 저 만치서 환한 얼굴로 웃기만 하신다. 그런 엄마의 미소가 꼭 복숭아를 닮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복숭아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복숭아 한 개를 깎으며 엄마 생각을 하고 또 한 개를 깎으며 눈물을 흘리며 그 달콤한 사랑을 씹는다.
어린 날 나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무척 심했다. 동네에서 유난히 똘똘한 아이로 불리던 나는 예민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특히 세 살이 되던 해에는 입술과 목이 붓고 구토와 설사, 온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호흡곤란증세까지 왔다. 좋다는 민간요법은 듣지도 않고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축 쳐진 몸에 호흡 곤란 증세까지 왔다.
'유난히도 병약하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한마디 내뱉고 문을 발로 차듯이 하고 나가버린 아버지는 그날 만취하여 돌아와 코를 골며 잠들었다. 엄마는 시체 같은 나를 안고 사방팔방 병원을 찾아다니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논인지 밭인지, 진흙인지 강물인지도 분간 못하고 헤매셨다. 같은 자리를 뺑뺑 돌기도 하며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에 찔리기를 수십 번, 그렇게 헤매다 새벽녘에나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날 의사에게서 복숭아는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어린것에게 복숭아 과즙을 먹여서 이렇게 됐다.'며 다 내 잘못이라며 엄마는 질책하며 한탄했다. 다들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육안으로 보면 분명 죽은 아이였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접한 복숭아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조각 목에 넘겼다. 그날 밤 엄마는 또, 흡사 미친 여인의 모습으로 논길인지 미나리 밭인지 분간도 못하고 오로지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하나로 달리셨다. 6남매나 되는 형제들 중에 엄마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온 날, 온 몸이 가렵고 붉고 넓적넓적한 동전 크기의 두드러기가 온 몸에 올라왔다. 그 다음날까지 나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엄마 등에 업혀서 병원을 가야했다. 탱자 삶은 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렵게 탱자를 구해 그 물에 목욕을 하게 했다. 신기하게도 탱자 물에 목욕을 하면 좋아졌다. 그로부터 우리 집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바뀌고, 이것저것 다양한 한약재와 음식에 대해 연구하시던 엄마는 어느새 나에 대해서는 명의가 되어 있었다.
집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복숭아를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복숭아 향이 너무 좋았고, 말랑말랑한 과육 한 조각 입 안 가득 채워 보는 게 소원이 되었다. 과일 가게에 진열이 된 복숭아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온몸이 근질근질거렸고, 우연히 복숭아털을 만진 날은 입 속부터 입 주변까지 온몸에 두드러기로 뒤덮였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복숭아라는 과일과는 천적이라도 된 것처럼 살았다.
결혼 후, 어느 날 우연히 남이 깎아주는 복숭아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복숭아를 보기만 해도 온몸이 가렵던 내가 복숭아를 먹었는데 아무런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너무나도 신기하여 고무장갑을 끼고 복숭아를 만져 보기도 했지만 그날 아무 일이 없었다. 체질이 변화되었을까 병원에서 수차례 알레르기 검사를 해봤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환경과 상황에 의해 체질이 바뀔 수도 있다며 유발원인 물체를 멀리하라는 말만 강조했다. 어찌됐든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무엇보다 감사했다.
볼그레한 아이의 뺨 같은 사랑스런 빛깔의 복숭아를 엄마가 좋아한다는 것을 외가에서 처음 듣게 되었다. 복숭아를 너무 좋아해서 몇 군데 혼처 자리가 있었지만 엄마는 당당히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아버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때부터 넓은 평수의 복숭아밭을 가꿨고, 아버지가 친구에게 빚보증을 써준 대가로 지금은 남의 것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외가에서 나는 이전에 몰랐던 엄마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나 때문에 좋아하는 복숭아를 못 드시는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신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간암 말기로 병상에 누우셨다. 매일 복수를 빼는데도 엄마의 배는 더 볼록해져갔다. 아무것도 못 드시는데 그나마 복숭아 즙은 입에 대신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대로 엄마는 3개월 뒤에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엄마는 나를 살렸지만, 나는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 어떤 수를 쓸 재간이 없다. 엄마는 아픈 나를 업고 깜깜한 밤을 달려 나를 살렸는데, 나는 병상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며 우는 것이 전부였다. 빗물 같은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의사의 선전포고를 받은 날 엄마에게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라는 말과 함께 내 눈에서는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내 눈물을 보시곤 '치료하면 낫는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던 엄마.
'복숭아 사 올게요.'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
"너 소싯적 복숭아 먹으면 안 된다고 할 때부터 엄마는 그 후로 복숭아는 입에도 안 댔어,"
시장으로 달려가는 내내 나의 가슴은 먹먹했다. 복숭아를 한아름 사가지고 왔지만, 엄마는 그 좋아하는 복숭아를 한조각도 삼키지 못했다. 입맛이 없다며 치료 받고 나아지면 먹겠다며 고개를 돌리시는 모습이 엄마의 마지막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진흙의 늪에 빠진 줄도 모르고 가시덤불에 걸리고 찔리는 것도 모른 체 헤매던 엄마. 자식을 살리려는 그 마음 하나로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신 강렬한 모정의 엄마가 남아 있다. 복숭아는 나에게 엄마의 젖 맛처럼 은은하고 포근한 맛이다. 당신이 가신 날 마지막 모습과도 무척이나 닮았던 황도를 나는 좋아한다. 그 단맛의 국물이 엄마가 흘린 눈물 같다.
좋아하는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앉은 자리에서 이제 서너 개쯤은 거뜬히 먹어도 내 몸에서 아무 증상이 나타나질 않는다. 돌아가신 엄마가 당신이 못 드시던 것까지 다 먹으라고 나에게 준 선물인 것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