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자작나무야 자작나무야 / 손광성

희라킴 2017. 4. 18. 19:29


자작나무야 자작나무야 

 

                                                                                                                                손광성  

 

  내 고향 함경도 지방에는 자작나무가 많다. 누나를 따라 나물을 캐러 가면 언제나 자작나무 숲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새를 좇아 산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또 우리는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에 와 있곤 했다. 그 신비스러운 하얀 빛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마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빽빽이 들어선 어두운 이깔나무 숲에서 내다보면 자작나무 숲은 언제나 햇빛이 환히 밝았다. 더구나 오월의 밝은 햇빛을 받아 싱싱하게 물이 오를 때면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의 알몸마냥 사람을 호리게 했다.


 가까이 가서 손을 대면 손끝을 타고 오던 보드라운 감촉. 서양 여인의 살갗처럼 희디흰 껍질에서는 향긋한 분 냄새라도 묻어날 것만 같았다. 셀로판지 같은 껍질을 벗기면 그 밑에 더 희고 고운 새 살이 나타났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 위에 이름을 마구 새겼다. 하지만 언제나 고스란히 남던 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풀리지 않는 갈증 같은 것들.


  시는 나 같은 바보라도 쓰는 것,

  아름다운 나무는 신만이 만드신다.


  조이스 킬머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한 그루의 자작나무이다. 섬세하고 미묘한 시심 같은 나무. 이방의 여인같이 조금은 슬퍼보이는 나무. 그래서 우러러볼수록 그립고 안타까우며 슬퍼지는 그런 나무이다.


  북녘에 겨울이 오면 자작나무 숲은 깊은 명상에 잠긴다.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자작나무의 호흡은 깊고 잔잔하며 아득하다. 하얀 줄기는 눈빛에 바래다 못해 아예 눈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적갈색의 여린 잔가지들과 거기 미련처럼 남은 몇 개의 마른 잎사귀들.


 지우개로 지워 버린 연필 그림처럼, 아니, 파스텔화처럼 희미한 윤곽 속에서 자작나무 숲은 아주아주 먼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뒷모습 같은, 그런 아슴푸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는 그래서 가장 보잘것없는 한 마리의 멧새조차 고스란히 시야에 잡히게 마련이다. 화선지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처럼.


  거기에 눈이라도 올라치면 자작나무 숲은 아득한 몽상 속으로 잠겨 버린다. 눈이 오는 날 자작나무 숲 속을 거닐다 보면 나같은 바보도 시인이 된다.


 자작나무는 섬세한 나무이다.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굳건한 기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연약한 몸으로 추위를 잘 참아낸다.


 서울에서도 자작나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사는 그런 자작나무가 아니다. 생기를 잃은 나무요, 앓고 있는 나무이며, 볼모로 잡혀 있는 나무이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한 마리 학과 같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뜰에 자작나무를 심고 싶은 때가 있었지만 그만두기로 한 것은 그 추레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 고향 관북 지방에서는 이 나무를 '보티나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죽으면 이 나무 껍질로 싸서 땅에 묻는 풍습이 있다. 언제 다시 고향에 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제일 먼저 그 때 그 자작나무 숲으로 가겠다. 그리고 자작나무 밑에서 살다가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서 자작나무 곁에 잠들었으면 싶다.


 아름다운 나무여, 그리운 고향의 나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