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투명 대문 / 박헬레나

희라킴 2017. 4. 13. 19:37


투명 대문  

                                                                                                                                   박헬레나


  거리는 한적하고 유월의 땡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가 확확 열기를 내뿜는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당을 앞에 두고 나는 지금 바깥에 갇혀 있다. 시간에 쫓겨 황급히 나오느라 열쇠꾸러미를 두고 나온 것이 내가 지금 대문 밖에 묶여 있는 원인이다. 목적한 곳에 진입할 수 없으니 드넓은 세상도 나를 가두는 하나의 방에 불과하다.


  우리 집 대문은 투명하다. 듬성듬성 창살에 여백을 두어 안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바람과 햇살과 사람의 마음까지도 자유로이 들락거릴 것을 꿈꾸며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긴장도 단절도 거부하며 소통을 꿈꾸는 내 속내의 또 다른 표현이다.


  게으른 주인을 만나 잡초밭이 되어버린 잔디와 몇 그루 정원수가 붉은 벽돌건물과 어우러져 밖에서 얼핏 보면 제법 꼴을 갖춘 저택 같아 보인다. 한눈에 집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그 트인 대문을 나는 열린 마음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그 문이 안과 밖을 엄격히 경계를 지으며 나부터 막고 출입을 거부한다. 그러고 보니 말이 트인 문이지 막을 건 다 막아내는 철저한 차단막이다. 


  대문은 그 집 얼굴이다. 신분과 경제력에 비례하여 다양한 얼굴로 집 안팎을 가르며 마당과 바깥을 구분짓는다. 동시에 나누인 공간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대문은 차단과 소통, 상반된 두 역할을 거리낌 없이 해내는 이중능력자다. 


  나의 고향에 대한 기억의 중심에는 분가하여 산 우리 집보다도 큰댁의 풍경들이 살아 있다. 큰댁에는 대문이 둘이었다. 바깥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돌아 초당과 사랑채에 이르고, 조금 어긋나게 중문을 들어서야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당에는 머슴들, 사랑에는 증조부님과 조부님, 그리고 도회지에서 가끔 귀가하시는 아버지의 형제분들, 안채에는 할머니와 큰어머니, 사촌 형제들, 항상 많은 식구가 들끓었다. 바깥어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안채에 들지 않았고 여자들은 사랑채 출입을 아주 조심스럽게 했다. 겹겹이 두른 담 안이 그 시대 여인들의 평생 활동무대였고 그네들의 발걸음은 대문 안에서조차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남녀를 구별하여 기거를 따로하는 생활관습과 높은 담, 겹 대문은 꼿꼿이 새운 반가의 법도요 자존심이었다. 그로 해서 대문은 내게 소통보다는 보호막이자 차단과 구속의 의미로 각인되어 있다.


  근대의 격변기를 지나며 대문이 더 이상 구속의 의미는 잃어버렸다. 대신 철저한 자기보호를 목적으로 그 역할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주거 형태가 변하여 굳이 대문이 필요 없는 아파트의 경우에도 문은 존재한다. 문명의 이기들이 옛날 사대부 집 솟을대문의 문지기보다 더 확실하게 문을 지킨다. 아파트단지에 가면 건물 입구에서부터 방문객을 밀어낸다. 카드를 지니거나 주인이 안에서 버튼을 눌러주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높은 문지방이다. 사생활 보호가 철저히 되어있는 높은 문지방은 한정된 사람들만 왕래할 수 있어 자칫 배타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내가 쳐놓은 덫에 내가 걸렸다. 처가에 다니러 온 이웃집 사위가 사정을 듣더니 우리 집 담을 넘었다. 젊은 남정네가 마음만 먹으면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담은 굳이 왜 둘러치며 대문을 달아 잠금장치를 하는가. 무슨 위대한 보물이라도 집 안에 숨겨 놓았는가. 열린 척 꼭꼭 닫아놓은 내 가슴을 내보이는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소통하려면 열어젖혀야 한다. 마음이건 문이건 닫아놓고 소통할 수는 없다. 신변보호가 제대로 되려면 아무나 임의로 침입할 수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출입문을 꼭꼭 닫아 걸어야 한다. ‘소통과 신변보호’  이 극과 극의 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 주기를 바라며 세워놓은 것이 어정쩡한 우리 집 투명 대문이다. 언뜻 두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 같으나 그 안에는 ‘창과 방패’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담장 허물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담에 갇혀 있던 건물과 마당이 밖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아기자기 가꾸어 놓은 화단이 정겹다. 고운 꽃보다, 살짝 번지는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그 집주인의 열린 가슴이다. 소통을 꿈꾸며 세워놓은 불통의 투명 대문, 언젠가 그 대문이 헐리는 날, 조금은 두렵다고 느껴지는 바깥세상과 나 사이의 벽도 허물어지리라.


  늘 생각에 머물었을 뿐 실행하지 못한 나의 담장 허물기와 대문 철거작업은 언제쯤 실현이 될지, 트인 듯 막힌 대문과 열린 듯 닫아놓은 내 가슴이 아직은 서로 굳게 손잡고 있다. 담이 있으므로 대문이 존재한다. 문단속깨나 하는 남편을 핑계 삼아 엉거주춤하고 있는 건 아직도 껍질을 깨고 자신을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일까. 참으로 어려운 것이 세워놓은 것 허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