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껍질 / 권현옥

희라킴 2017. 2. 5. 11:55



껍질 


                                                                                                              권현옥 


 너는 좋아. 너는 아니야. 야채 가게에서 분명 껍질을 보고 맘에 든 놈을 바구니에 담아왔다. 그런데 그것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앞치마를 두르면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먹을 것과 버릴 것, 순하게 말하면 ‘다듬기’라 할 수 있지만 실은 껍질을 죄다 버리는 일이다.


 다듬어진 깔끔한 알몸이야 식욕을 자극하니 흐뭇하다 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껍질에게서 야릇한 선함을 느끼는 것은 무얼까 싶다. 체온을 위해, 속을 위해, 껍질이 되었다가 지쳐 벗겨진 빨래 통의 빨랫감처럼 껍질로 수북한 음식 쓰레기가 밉지 않다. 사람의 손과 입을 실컷 거친 음식쓰레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죽음 같은 것인지, 훌러덩 속을 던져 놓음으로 느껴지는 가벼움인지 모르겠다.


 껍질은 제 존재의 깃발이었다. 제 몸을 알리는 맨 먼저의 깃발이었다. 흙으로부터 나왔거나 모태의 몸에서 나왔거나, 강한 힘으로 밀고 나왔지만 한없이 연하게 고개 내민, 당당하지만 수줍게 고개 내민 깃발이었다. ‘나 여기 있다’는, ‘나 세상이 붙여진 이름대로’라는, 최초의 시간을 간직한 고참이다. 이름 붙여진 사명대로 자라서 인간의 눈과 혀가 껍질을 향해 절정의 순간이라고 결정내릴 때까지, 그래서 목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카리스마를 지켜 제 속성을 지킨 고참이다.


 땅 속에서 흙을 입고 자란 껍질은 대체로 온순하나 햇살과 바람에 몸 열고 몸 닫으며 속 키워내고 끝내 드러낸 껍질의 혈색은 강하다. 연하기만 했던 마음도 속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대로 힘주다보니 대부분 근육질 키워 질기거나 거친 건 당연, 그것으로 속의 품위를 지켜왔다. 시작을 유지하고 숨을 놓았던 순간까지를 머금은 껍질이다. 사람들은 껍질의 솔직성을 믿고 속살에 대한 의심을 푼다. 그리고 그것을 사고 속을 먹기 위해 애쓴 껍질을 버리곤 한다.


 오늘도 나는 싱크대 위에 닭볶음탕을 만들려고 재료들을 오종종 앉혀 놨다. 맨 먼저 하는 일이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손질 된 닭이라 해도 닭 껍질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라 그대로 있다. 등껍질을 잡아 당겼다. 따라 올라온다. 가위로 다 잘라내고 지방 덩어리까지 제거했다.


 감자 세 개를 꺼내고 껍질 깎는 칼을 몸에 댔다. 가볍게 칼을 내 쪽으로 잡아당기니 껍질은 약간의 속살과 함께 벗겨진다. 미끈하고 깔끔해졌다. 다시 당근의 몸에 갖다 댄다. 긴 당근의 뿌리 쪽부터 시선을 주며 내리긋는다. 주욱 주욱. 빠알간 껍질은 싱크대 안으로 떨어지며 절퍼덕 주저앉는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길게 벗겨져 무릎을 꿇듯 주저앉는 모습에서도 유쾌를 느낀다.


 양파는 뿌리 쪽을 칼로 끊어내면 껍질 벗기기가 쉽다. 속을 보호하려는 껍질이라기보다 벗겨지려고 입은 옷처럼, 얇게 입고 있는 앙큼한 양파다. 묵직한 속을 위한 최소의 껍질이 신통하다.


 억세진 파 껍질을 벗기고 마늘도 껍질을 벗겨 놓았다. 끈질기게 지켜온 속살, 식재료가 된 이후에도 마르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 뽀얀 속살을 내민 재료와 아직 숨죽지 않은 껍질들은 이제 제 갈 길을 가야한다.


 껍질을 벗은 모든 식재료들이 고춧가루와 고추장 범벅이 되어 불에 졸여지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함께 사는 식구가 들어온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그는 껍질을 벗으려는 듯 방으로 들어가고 맨 먼저 윗옷을 벗고 아래옷을 벗고 양말을 벗는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모습을 연출하려는 듯, 보호하려는 의도나 보이고 싶은 모든 것을 ‘임시저장’에 눌러놓고 나와서 딴청을 부리는 사람처럼 편한 얼굴을 한다. 방금 문밖에 섰던 신사의 얼굴과는 다른, 아무렇게나 봐줘도 무방하다는 얼굴이다. 우적우적 식사를 할 때 나는 어느 구석에서도 그가 문밖에서 예의를 애써 잘 지키고 책임감에 몸을 혹사하고 진정성에 맘이 외로워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벗은 껍질들의 노고에 대해 눈치라도 채고 있기에 벗겨진 껍질이 밉지 않은가 보다. 지켜야할 것을 위해 애썼던 흔적이며 자신임이 드러난 빛깔이기에….


 닭볶음탕이 껍질을 다 벗은 속살과 양념으로 엉겼어도 속성이 남아 맛을 내듯 그렇게 나도 앉아서 속성을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난 뒤 설거지를 한다. 껍질과는 다르게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만지는 일은 얼마만큼의 각오가 필요하다. 서로 어우러져 맛을 냈을 때는 행복했는데 버려졌을 때는 얼마나 찝찝한 모습인가. 엉긴 음식물쓰레기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사람에게도 너무 엉기고 범벅이 되어 잉여 감정을 남기면 진력이 나고 힘들어지나 보다.


 가거라 껍질들아, 애쓴 또 하루의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