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그 황홀한 허상 / 반숙자
자유, 그 황홀한 허상
반숙자
스스럼없는 자리에서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날개를 줘, 내 날개를 줘"하며 주정을 했다고 한다. 그날로부터 남편은 자칭 나무꾼이고 나는 타칭 선녀가 된 셈이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나오는 '나무꾼과 선녀'의 두 주인공을 빗대어 한 농담이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진담이 배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날개에 대한 동경은 오래 전부터다. 어려서는 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꿈을 많이 꾸었다. 내가 새가 되어 날개를 펴고 날으려는 순간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아뜩한 상태에서 꿈을 깨었고, 땀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는데 어른들은 키가 크는 징조라고 일축해 버렸다.
조금 더 커서는 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나는 내 방을 갖고 싶었다. 어머니께 떼를 써서 얻어낸 방이 윗방인데 어두컴컴하고 추웠다. 곰팡내가 나고 곡식 자루가 쌓인 곳인데도 막무가내로 옮겨갔다. 겨우 작은 몸 하나 누일 만한 공간에서 바다 같은 자유가 느껴졌다. 그 끼가 무엇인지 풀어지지 않고 여지껏 남아 있지만 운명적인 무엇이 아닌가 싶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상상의 세계, 조그만 방에서 날개를 키우고 있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습을 하고 모험을 하여도 내 사유의 키밖에는 날 수가 없는 창공이다. 날개가 튼튼해야 높고 멀리 비상하는데 내 날개는 왜 이렇게 더디 크는가. 아니 크기도 전에 퇴화해 버린 것이 아닌가. 날개는 새의 상징이고 새는 무한한 자유의 원형일 터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가 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스키타이 황금전을 보았을 때다. 스키타이 족장의 가죽 모자에 장식된 순금 핀에 산자가 겹친 모양의 나무 위에서 새를 보았다. 나는 반가워서 돋보기까지 꺼내 쓰고 살펴보았다. 새들은 날렵한 날개로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모양인데, 새들 뒤로는 끝없이 넓고 푸른 시베리아의 하늘이 펼쳐진 듯한 착각 속에 빠졌었다. 그들은 기마족으로 유목민 생활을 했는데도 날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했던가 보다. 하기는 날아간다는 것과 달린다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에서도 산자형의 가지를 세우고 위쪽으로 금제 새들을 장식하였는데 , 두 나라의 유물이 모티브가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왜 사람들은 고래로부터 날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오래된 나의 의문이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조상신화에는 나무와 새를 신성시하는 사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고향은 하늘이고 하늘나라에서 높은 나무를 타고 땅에 내려와서 살다가 죽고 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이때 육신과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새의 역할이다. 일테면 새와 나무는 천계와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신화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땅에 속하기 때문에 하늘을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인의 땅은 무엇인가? 일 년에 한두 번쯤 집을 비우려면 떠나기 전 일주일과 돌아와서 그만큼 식구들 눈치를 봐야 한다. 가족들이 나무라는 것도 아닌데 주부의 자리를 비웠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전에는 침입자가 밖에 있는 줄 알았다. 모든 시간을 바치라는 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내 날개에 털을 뽑고 여건들이 상승의 원동력을 부식시킨다고 알았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피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던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맥주 몇 잔의 주기로 날개타령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성싶다. 지난 수필 세미나 때 만난 여인은 이십 년간 시부모와 남편, 아이들 외에는 생각한 일이 없는 모범주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집안일 말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식과 남편은 과연 나의 생명인가. 의문이 꼬리를 무는 순간부터 갈등이 일어나서 문화센터를 찾았다. 이번 세미나에 오고 싶어 남편에게 상의를 하였는데 첫마디에 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순간 자신을 낭떠러지로 떠다미는 남편의 얼굴이 너무도 비정해서 '죽어도 간다'고 버티었다. 남편은 창백해진 얼굴로 문학이냐,가정이냐? 양자택일하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삼일째가 되는 날, 남편은 자신의 친구에게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친구 왈 - 그 정도면 보내줘야 한다. 그대로 밀고 가면 죽든가 아니면 도망을 칠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비로소 그녀의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명과도 맞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 과연 있을까?
나는 이제서야 자유의 허상에 취한 나를 알아본다. 무한하다는 하늘을 다 날아보기는 어렵다. 지극히 작은 한 부분, 나의 하늘을 날아보고는, 황홀한 신기루에 홀려 사막을 헤매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하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날개 또한 누가 달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도 날개도 내 안에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집 나무꾼은 아직도 옷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해선지 희희낙락하고 있다. 제가 날면 어디만큼 날으랴. 애써 날아보아야 부처님 손바닥에 든 손오공이라고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나를 해방시킬 수도 있고 나를 구속 할 수도 있는 나를 찾아 나에게 이르는 진정한 자유의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