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꾸는 꿈 / 임만빈
새로 꾸는 꿈
임만빈
눈을 뜬다. 누군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고 미간을 찡그린다. 아내의 모습 같다. 간호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환자실은 아닌 것 같다. 돌아온 것이다. 레테(Lethe)의 망각의 강을 건넜던 혼령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액 줄을 따라 흐르던 마취제, 그것은 망각의 강물처럼 한 방울, 두 방울 내 몸속으로 들어와 기억을 모두 가져갔었다. 수술 받던 그 기간의 기억들을.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수술실로 밀어 넣어졌던 기억, 다시는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간호사의 동정어린 한마디, 말없이 다가와 마취를 걸던 마취과 교수의 얼굴, 그 후 망각의 물을 마신 듯 잃어버린 기억, 희미하다가 선명해지는 아내의 모습, 뚜렷이 보이는 옷장, 벽에 붙은 텔레비전 화면···, 병실로 다시 돌아 온 것이다.
몸을 약간 움직이니 옆구리가 땅긴다.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내니 아내가 다가와 내 의식이 돌아 온 것을 확인한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는 말만 떠오른다. 어디서 읽었던가. 남편에게 ‘외도하는 것, 그것은 견딜 수 있어도 건강 잃는 모습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는 어느 분의 말, 가슴이 울컥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픔이 심하다. 기침할 때마다 상처부위가 뜨끔거리며 나를 긴장시킨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데 그래도 괴롭다. 태어날 때는 어머니의 아픔 속에서 편안하게 이 세상에 나왔지만, 돌아갈 때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며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아픈 옆구리를 바라본다. 수술 자리인 가슴 벽에는 반창고가 더덕더덕 붙어있고, 두 개의 고무 튜브가 상처 부위에서 나와 병실 바닥에 놓여있는 배액통과 연결되어 있다. 수술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튜브를 타고 배액통에 모인다. 물과 피가 섞인 액체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어릴 적 보았던 돼지를 도살할 때의 광경, 돼지가 숨을 쉴 때마다 울컥 울컥 목에서 쏟아지던 피가 연상된다.
배액 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기 방울들이 숨쉴 때마다 방울방울 물속에서 솟아올라 표면으로 사라지고 있다. 코에 꽂혀 있는 카테터를 통해 산소가 폐로 들어오고, 탄산가스가 고무 튜브를 타고 배액 통으로 배출되었다가, 수면 위로 떠 올라와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모습이다. 나는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뽀글뽀글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누구나 자신 속에 갖고 있는 것,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병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실감하는 것, 이 병만 낮게 해준다면, 다시 생명만 돌려준다면, 남은 생애 천사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하도록 하는 것, 평범한 일상이 정말로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정말로 진정한 감사함을 가르쳐 주는 것, 그리고 결국 죽음은 운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아픈 모습보다 아내의 모습이 더 안 돼 보인다. 흰머리카락이 무척 많아진 것 같고, 주름살도 깊어지고 숫자도 더해진 것 같다. 아내에게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아내가 지어 준 밥을 먹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병실이 아닌 병원으로 출근하던 때가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타 준 커피를 마시면서 아파트 창문을 통해 뒷산의 숲을 바라보던 기억, 주렁주렁 달렸던 아카시꽃을 바라보면서 꽃향기는 왜 없지 하고 코를 이리저리 벌름거리던 기억, 뒷산으로 산보가자는 아내의 청을 뿌리치고 테니스 경기를 하고 와서 한참동안 잔소리를 듣던 기억···.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모두 행복한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술한 집도의가 회진을 왔다. 얼굴이 나보다 더 핼쑥하다. 상처 부위가 아프냐고 묻는다. 무척 아프다고 대답한다. 두 번째 수술이어서 유착이 심하고 늑골도 골절시켰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대답한다. 수술하는 데도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고 술회한다. 수술하기 전에는 간단하다고 해놓고는. 내가 농담을 하면서 주치의를 위로한다. 어찌 아는 사람을, 가족이나 동료를 수술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설게 하기의 미숙함,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주치의가 말한다. 왼쪽 것도 수술해야 하는데 다음에 하자고. 우울하다. 반대 측 폐까지 전이되었다면 4기(期)다. 5년 생존율 0%이고 2년 생존율 50%이다. 왜 한꺼번에 수술하지. 속으로 중얼거린다. 양쪽을 한꺼번에 수술하면 폐 기능이 떨어져 위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주치의가 나가자 아내가 흘쩍거린다. 나도 우울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주치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하지.
희망을 가져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판도라 상자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지 않는가. 일생 동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꿈은 꿔야겠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등대로」에서 램지 일가가 등대로 가고자 하는 꿈을 10년 이상 꾸다가 마침내 등대에 다가가듯이, 나도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가져야겠다.
조용히 눈을 감고 꿈을 꾼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일주하기, 조그만 오두막집을 산골에 짓고 마음껏 책 읽고 글쓰기, 컨테이너 집을 호숫가에 짓고 낚시하면서 소로우 흉내 내기, 그리고……. 많은 꿈을 꾸고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면서 나머지 삶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