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우물자리 / 김선화

희라킴 2016. 11. 29. 18:09




우물자리


                                                                                                                                            김선화


 쾌청한 봄날, 대리석인 듯싶은 암반 틈새에서 물이 솟는다. 그것은 금세 우물을 이루더니 찰랑찰랑 흘러넘친다. () 안의 물에 내 얼굴이 비치는데, 물빛은 하늘을 닮아 푸르고 얼굴은 바위를 닮아 검푸르다. 꿈이었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묘해진다. 원초의 바닥으로 돌아가는 느낌마저 든다. 삶에서 부대끼는 온갖 욕심들도 일순 사라진다. 무욕의 지극한 고요 속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열릴 것 같은 예감에 설레기도 한다.


 고향집 뒷산 기슭엔 가마터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몇 걸음 거리에 바가지샘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그 마을에 터를 잡기 전부터 자기(瓷器)를 굽던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흙 반죽을 했을 물이다. 산속에 외딴집을 짓고 도자기에 혼을 불어넣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을 사람들. 덩그마니 그 터를 지키는 우물자리를 통해서 나는 그네들의 삶을 유추해보곤 했다. 사방형으로 땅을 움푹이 파서 돌을 쌓은 형식은 어느 시대의 건축기법인지 모르지만, 한때 그곳에서 보금자리를 이뤘던 사람들의 향기가 우물자리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듯 했다. 허나 그들은 간데없고 사금파리만 널브러진 나지막한 샘가엔 해묵은 낙엽들이 쌓여 가는데, 흙을 파내어 생긴 반 경사 언덕에선 신기한 광물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러한 곳의 우물을 우리 가족은 아예 못 먹는 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그 우물자리를 나는 가끔씩 꿈길에서 만난다. 고향을 떠나온 후로 가본 일도 없건만 작은아이의 태몽이 그 우물과 관련된다. 그 옛날 등한히 여겼던 묵은 우물 하나가 나와 내 아이에게는 또 다른 근원으로 터를 잡는 것이다.


 이처럼 어릴 때 가까이 했던 물은 그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나보다. 먹고 자란 물은 물론이고 보고 자란 물이어도, 그건 한 사람의 근원이 되어 밀접하게 따라붙는다. 어머니의 자궁, 즉 물에서 왔고, 물로 돌아간다는 사람들의 삶에는 우물과 관계된 설화도 많다. 통일신라시대의 선승 범일국사에 읽힌 탄생설화도 우물과 관계된다.


 강원도 명주군 학산 마을의 한 처녀가 석천(石泉)’이란 샘물을 길어다가 마시려는데 그 속에 해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처녀는 그 물을 마신 뒤로 태기가 있어 13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범일국사라고.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당나라에서 도를 깨쳐 국사가 되었고, 열반한 후에는 대관령에 올라 산신령이 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온다. 그때 범일국사의 어머니가 마셨다는 석천은 지금은 볼품없지만, 신성성이 깃든 우물로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소설을 쓰는 형제들과 사람의 근원에 대해 얘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물이다. 그것도 어린 날 먹었던 물 중 가장 놓은 지대에서 나던 물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능선너머에 있는 골짜기엔 가재가 기어 다니는 지반사이로 얼음장 같은 물이 흘렀다. 부모님이 땅을 개간했다 하여 생땅판데라고 부르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족은 그곳에 주전자 하나 너비의 보를 쌓고, 그곳에서 냉수를 길어다 먹으며 여름을 나곤하였다. 어디든 물이 고인 곳이면 발원지가 있듯이, 우리 형제들의 정서적 근원지는 바로 그 생땅판데인 셈이다. 그런 얘기를 나눌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미소가 고인다. 그만큼 우물자리는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비의 요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알기가 어렵다. 고향마을이 골프장 풀밭에 들어있는 까닭이다. 우리 형제들의 정서적 근원이 되어주던 골짜기나 내 아이의 태몽으로 안겨들던 우물터는, 이제 다시금 누구의 몸을 적시며 되살아나고 있을까.

나는 어딜 가나 우물자리를 만났을 때 가슴이 뛴다. 생수가 솟고 있으면 더없이 반갑고, 우물터나마 보존되어 있으면 선인들의 생전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어서 그 역시 반갑다. 청산리대첩 등으로 민족혼을 불태운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서 물맛을 보았는데, 문화의 인물을 많이 낸 그곳 사람들 말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을 최영 장군의 환생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윤회사상으로 미루어볼 때 그럴 법한 얘기이나,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야 신이 아닌 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생이 다해 흙으로, 물로, 공기로 돌아갔다가 다시 생명을 얻어 환생한다는 이치를 나는 우물터에서 찾는다. 물이 지닌 생성의 상징성 때문인지 모르지만 우물자리에서 곧잘 그런 의미를 건져 올린다. 땅에 스며든 물이 여과되어 우리들의 몸을 적시고, 그 몸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오고. 그래서인지 오래 전 사람들이 먹고 간 샘물을 맛볼 때 시공을 뛰어넘는 교류가 이뤄진다. 내가 그들이 되고, 그들이 내가 되어 내 안에서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