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는 무릎을 꿇는다 / 마경덕
낙타는 무릎을 꿇는다
마경덕
모래바람이 낙타의 속눈썹을 자라게 하고 목마름이 낙타의 등에 혹을 키운다. 선인장은 온몸에 가시를 꽂고 갈증을 견딘다. 스스로 사막이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곳, 바람이 모래기둥으로 일어서는 사막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뿐이다.
그러나 뜨거운 모래폭풍이 휘몰아칠 때 낙타도 가던 발을 멈춘다. 무릎을 꿇고 모래 폭풍이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사막을 건너는 힘은 참을성 많은 낙타의 무릎에서 나온다. 굳은살이 박힌 무릎만이 모래 언덕을 넘을 수 있다.
사막은 곧잘 길을 지워버린다. 걸어온 발자국을 지우고 가야할 길을 모래에 묻는다. 사막을 건너려면 입과 귓속으로 파고 드는 모래와 갈증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한다. 그러나 광활한 사막도 한 알 한 알의 모래일 뿐이다. 작은 모래알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사막.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부드럽고 작은 알갱이들이 모래늪이 되어 발목을 붙잡고 뼈를 묻는다. 바위가 모래가 되기까지는 만년이 걸린다는데, 그렇다면 모래는 얼마를 기다려야 모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시의 사막을 헤매는 시인도 낙타의 무릎을 가졌다. 신기루 같은 시는 설핏 보였다가 사라진다. 바람은 약대를 거느리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大商들의 발자국마저도 모래밭에 묻는다. 가끔 길을 잃은 사람의 뼈를 꺼내 보여주는 사막에서 시인은 좌절하고 털썩 무릎을 꿇는다. 시를 위해 무릎을 꿇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라. 어쩌다 오아시스 같은 시 한 편을 만나 목을 축이기 위해 시에 목마른 시인은 낙타처럼 몸을 낮춘다. 막막한 사막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타는 입술로 시를 불러 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낙타의 무릎을 가질 수 없다.
낙타의 양쪽 무릎에 붙은 혹은 고난의 상처다. 야고보도 낙타의 무릎을 가지고 있었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고난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떤 위기에 몰렸을 때 원망이나 좌절대신 먼저 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겸손한 자만이 낙타의 무릎을 가질 수 있다.
어느 시인은 낙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에 정직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막을 건너려면 한 마리 낙타가 되어 혹이 불룩하게 솟을 때까지 터벅터벅 걸어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낙타가 되지 않는다면 깊은 땅속의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낼 수 없다. 당신은 낙타가 된 적이 있는가? 낙타의 젖은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사막의 복병은 또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끝없는 사막에서 엄습해오는 고독과 싸워야 한다. '오르탕스 블루'는 사막이라는 시에서 외로움을 이렇게 말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이 짤막한 시는 파리 지하철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 당선작이다. 인적이 끊긴 사막에서 뒷걸음치며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한다. 불안을 혼자 감당하기엔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사막에서 외로움이란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무릎이 없는 나무는 늘 서있다. 몸을 굽힐 수 없어 그대로 벼락을 맞기도 한다. 구부리지 못하는 나무는 바람에게 찢거거나 뿌리 채 뽑혀 쓰러지기도 한다. 나무는 스스로 몸을 낮출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왜 무릎을 주셨을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관절이 있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의 관절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다. 뻣뻣한 관절로 지내는 사람은 자칫 부러지기 쉽다.
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좋아하신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다 들으시는 신은 겸손한 낙타무릎을 사랑하신다. 외로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낙타의 무릎은 고통과 눈물과 정직함이다.
지하 계단에 엎드려 구걸하는 노인을 보면 낙타의 무릎이 떠오른다. 회오리바람을 피해 엎드린 저 무릎은 너덜너덜 해어져 있다. 얼마나 많은 모래폭풍에 휩쓸렸나. 멈추지 않는 모래기둥에 노인은 눈마저 뜨지 못한다. 구부린 등은 구원의 손길을 묵묵히 기다린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추위에 떠는 노인은 이미 노련한 낙타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없이 사막을 헤매고 다닌 늙은 낙타는 바람이 잠들기만은 기다린다. 지하도에 쪼그려 앉아 더덕을 까고 있는 노인의 주름진 손도 기도만큼 간절하다. 중국산 더덕이 국산으로 변하고 독오른 전갈들이 꼬리를 치켜드는 도시의 사막.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긴 행렬이 줄을 잇는다. 전철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을 건너간다. 건조한 바람에 메마른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실려간다. 지친 얼굴들이 눈을 감고 실려간다.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무릎을 구부릴 자리가 없다.
어느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수십 년 눈물로 기도를 했는데 마루바닥이 눈물에 젖어 썩어갔다고 한다. 늘 무릎을 꿇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아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수십 년 엎드린 어머니의 무릎엔 기도가 쌓이듯 굳은살이 서서히 박혀갔을 것이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가 나오기 이전엔 대부분 펜이나 연필로 직접 글을 썼었다. 필기구를 잡고 글을 오래 쓰다 보면 펜을 잡은 손가락에 딱딱한 못이 박혔다. 펜혹은 글이 남긴 아름다운 상처다. 어느 시인은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펜혹의 두께로 글쓰기를 보낸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펜혹도 낙타의 무릎과 같은 것이다. 원고지를 메우며 흘린 그 많은 땀방울이 무릎을 꿇고 올린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시인은 그저 글을 쓰는 글쟁이가 아니다. 수행을 하듯 마음을 닦지 않으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제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시듯 몸을 헐어 시를 뽑아 올려야한다. 시인은 낙타가 되어 뜨거운 시의 사막을 맨발로 건너야한다. 눈을 뜰 수 없는 모래폭풍을 견뎌야한다. 굳은살이 박히도록 수천 번 수만 번 세상게서 낮아져야 한다. 눈물을 뿌려보지 않고 어떻게 아픔을 말할 수 있는가? 아픈 척 하는 시인의 엄살엔 고통이 없다. 감동이 없다. 시인은 시 한편 낳기 위해 앓고 또 앓는다. 시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淨化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시의 힘이다. 시인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시인에게 굳이 사람 人을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인이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한다. 사람에게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직 시인이 되지 못했다는 말인데, 진짜 사람이 되어 시인 노릇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이 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사람인 척하는 짐승이 있고 짐승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가짜와 진짜가 구별이 어려운 것은 가짜가 진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짐승의 짓을 하는 사람은 가장 사람다운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가면이 벗겨지는 날까지 그는 사람인 것이다.
참과 거짓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한 몸이면서도 모습이 다르다. 빛이 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낮고 천한 것들 속에 시가 숨어있었다. 근사하고 멋진 것들 속에서는 시를 찾기 어려웠다. 내 시는 높은 곳보다 바닥을 좋아한다. 세상에는 바닥에서 사는 사람이 훨씬 많다. 정상에 서있는 것들은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더는 오를 데가 없으니 내려올 일만 남았지만 바닥은 내려갈 데가 없다. 오르는 일만 남았다. 나무도 평지에서 자라는 나무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비탈에서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자란다. 그 비탈이 모여 산을 쌓는다. 비탈을 붙잡고 자란 나무뿌리는 단단한 바위도 뚫는다. 나무가 쌓아올린 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무릎의 아래' 슬하膝下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모두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무릎을 넘어서면 우리는 안전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낙타의 무릎은 안전지대이다. 좌절과 위기를 통해 낙타의 무릎이 만들어진다. 신은 왜 우리에게 무릎을 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