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독(毒) / 김은주
눈독(毒)
김은주
눈치 밥을 먹는 아이는 살이 오르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밥을 적게 먹는 것도 아니고 먹을 만큼 먹는데도 살이 오르지 않음은 눈길을 꼽고 앉아있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눈독 때문은 아닐까? 입으로 들어간 음식물이 에너지화 될 수 없을 만큼 눈의 독이란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다.
독사가 먹잇감을 포착한 후에 덥석 입으로 가져가기 전 수초 동안 쏘아보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대기 속에 흐르는 무형의 기류에 압도된 먹잇감은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제풀에 무릎이 꺾이고 만다. 이것이 눈독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거의 독(毒)을 지니고 산다. 모름지기 독이라 함은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을 테고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방어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에게는 분명 눈독이라는 게 있다.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대개는 나쁜 의미가 더 많은 듯하다.
이런 나쁜 눈독과는 전혀 다른 눈독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찻잔이며 종 모으기를 좋아하는 나는 서울 나들이를 가면 인사동 구경을 빼 먹지 않는다. 낮은 한옥담과 낙낙한 사람들의 훈기가 좋아 하릴없이 그곳 골목길을 누비며 다니고는 한다. 그러고 다니다 보면 내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물건을 어떻게 하던지 내 손에 쥘 수 있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때부터 마음이 그 물건에 잡혀 도무지 헤어나질 못한다. 처음에는 눈독으로 시작한 일이 끝내 마음자리까지 빼앗기고 마는구나 싶어 스스로 그런 마음에 빠지지 않으려고 경계하건만 그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다 인사동 골목길에서 만난 기막힌 시 한 구절이 있다. 보쌈집과 생맥주집 사이 담벼락에 누가 써놓았는지 모를 눈독에 관한 낙서가 그것이다.
“사랑은 눈독 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낙서처럼 써진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누군지 지독한 사랑의 눈길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우려낼 수 없는 경지라는 걸 깨닫게 된다. 다들 나쁘다고만 생각하는 눈독이 여기서는 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복국집에서 특별한 고객에게만 내어 놓는 복어의 쓸개로 빚은 술을 마셔본 적이 있는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혼곤한 알싸함, 그 독성이 사랑의 눈독을 경험한 마음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듯 아련한 사랑의 눈독도 있지만, 어린 시절 또 다른 모습의 눈독을 경험한 적이 있다. 여름날 해질녘이면 분꽃이 앞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언제 피려나 싶어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꽃잎이 절대로 열리지 않았다. 마당 구석 쓰지 않는 맷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조급증을 내며 오므려진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수초의 시간이 어찌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그러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내 콧김에 파르르 잎새만 떨릴 뿐 끝내 꽃잎은 열리지 않았다. 저녁 답 내내 마당 귀퉁이에서 꽃 피기를 기다리는 나에게 엄마는 하늘 한번 쳐다보고 나면 거짓말처럼 꽃이 피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엄마 시키는 대로 한 후 한숨까지 휴우 뱉어 내고 보니 신통하게도 분꽃이 피어 있었다. 마음 없이 바라보는 내 눈길이 눈독이 된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이렇듯 눈독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 눈독이 상대를 고통에 들게 할 수도 있고 오감을 마취시켜 그 독성으로 인해 삶이 너그러워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제 각각의 색깔을 지닌 눈독이 우리네 삶 속에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눈의 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올 봄 나는 또다시 미련하게 눈독과 시름하고 있다. 유리창 밖은 찬바람이 분분해도 베란다 안은 입춘을 기점으로 식물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맨 처음 관음상 옆에 있는 멕시코 소철이 긴 새순을 뻗어 올리는가 싶더니 뒤이어 연둣빛 연약한 아스파라거스도 새잎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베란다에서 겨울을 견딘 철쭉나무 끝에는 무수한 꽃망울이 맺혀 있고, 제주도 부석에 담긴 콩 난도 겨우내 희멀건 색이더니 며칠 새 초록이 짙어졌다. 그 옆으로 단풍나무 분재가 나란히 두 개가 있는데, 똑같은 환경이지만 제각각 잎 피우는 시기가 다 다르다. 친구가 선물한 화분은 적당한 크기의 분에 넉넉한 거름 탓인지 해마다 남 먼저 잎을 틔운다. 하지만 접시처럼 고가 낮은 야생화 화분에 척박하게 심어 놓은 단풍나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봄이 깊어져야만 겨우 잎을 볼 수 있다.
나란히 두 개의 분이 있어도 부실한 단풍나무에 내 눈길이 더 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이루어지는 무의식의 세계이다. 나의 지대한 관심이 눈독이 되어 단풍나무를 버겁게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도 물을 주거나 빨래를 널다 보면 문득 그곳에 시선이 가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올 봄도 어김없이 그랬다. 바로 옆 단풍나무가 애기 손바닥 같은 잎을 납실거리고 있을 때에도 부실한 단풍나무는 가지 끝이 부풀어 오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더디 피는 단풍나무를 눈독이 해로운 줄 알면서도 봄이 깊도록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길을 거두는 날 저 또한 찬란히 피어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다. 눈길 탓에 생긴 독(毒)은 눈길을 거두는 일이 곧 약(藥)이 됨을 새삼 깨닫는 봄날 하루다.
- <문장> 2007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