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문을 열다 / 마경덕

희라킴 2016. 8. 17. 14:24




문을 열다


                                                                                                                                      마경덕



 문은 벽에 붙어산다. 문門은 한 장소의 경계나 건축물 입구에 사람이 드나들도록 벽을 터놓은 것, 문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벽뿐이다. 허술한 벽에는 쉽게 열리는 허술한 문이 있지만 벽이 단단하면 문도 완강해서 쉽게 출입을 허락지 않는다.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하는 접점에 문은 서 있다. 그러나 육중한 문도 잠금장치가 없다면 맥을 못 춘다. 문이 힘을 가지는 건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자물통과 열쇠라는 도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갖가지 첨단장비가 등장하고 문도 인간을 따라 진화해 왔다. 범죄예방과 외부의 적을 차단하는 문은 이제 단순한 출구가 아닌 것이다. 개방된 장소에서만 사용되는 회전문, 자동문 안팎에는 자물쇠가 가진 또 다른 문이 존재한다.

 1. 문고리

 언젠가 창경궁 명정전의 문고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손이 거쳐 갔는지 문고리 닿은 자리가 우묵하게 파여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문고리를 잡았던 손의 반동에 문은 수없이 부딪히며 둥글게 자국을 낸 것이다. 명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명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곳, 왕의 위엄이 서린 옥좌는 이제 텅 비어있다. 수없이 당기고 밀던 손은 사라지고 문고리만 남아 낡은 문짝을 붙들고 있다.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문고리는 제 앉은 자리에 흔적을 남겨 유수처럼 흘러간 세월을 말하고 있다. '창경궁'이 궁의 위엄을 잃고 '창경원'으로 불리웠을 때 일제의 '조선 말살 정책'으로 빚어진 벚나무는 40년간 창경궁 안뜰을 차지하고 우리는 밤벚꽃놀이와 동물원으로 변해버린 궁에서 원숭이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그때도 문고리는 문을 떠나지 않았다. 참으로 오래 견디었다.

 2. 나무의 문

 송주성 시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에게 길을 물어서 집을 찾아왔는지 꽃이 대문을 열고 쑥 들어온다." 어디쯤에서 다른 가지를 펼칠지 아무도 모르는 허공의 길을 걸어가서 나무는 가지 끝에 길을 내고 꽃은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나무의 문은 수많은 가지 끝에 있다는 것, 봄이 오면 사방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꽃은 제가 열었던 문을 기억한다. 진달래는 진달래 문이 있고 라일락은 라일락의 문이 있다. 한 번도 남의 집 문을 열어본 적 없는 꽃들은 정직하다. 언제나 나무의 문은 아름답다. 사람만이 제 문이 아닌 문을 밀고 들어와 제 집이 아닌 곳에서 훔치고 강탈하고 별의별 짓을 다 벌인다.

 3. 냉장고의 문

 침묵의 문이다. 좋은 냉장고는 입이 무겁다. 입을 벌려도 금세 닫는다. 입을 꽉 다물지 않으면 무언가 자꾸 새어나온다. 딱딱하게 굳었던 것들이 질금질금 녹아 흐른다. 저 많은 것을 품고 발설하지 못하는 냉장고는 밤마다 웅웅, 홀로 운다. 용량이 크면 클수록 비밀은 더 많아져서 슬픔도 더 늘어난다. 그는 사각으로 눈물을 얼려 나누어준다. 얼음을 깨물면 이가 시리고 혀가 시린 것은 그 때문이다. 핵가족시대. 식구들은 줄어드는데 냉장고는 갈수록 몸을 불린다. 변질되기 쉬운 것, 저장하고 싶은 것이 많아져서 자꾸만 냉장고의 문이 늘어난다. 하지만 굳게 닫힌 그 문을 믿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냉장고라도 침묵은 늘 깨어지기 마련이다.

 4. 수문

 몇 해 전 홍수가 그치고 팔당댐을 지나가는데 수력발전소 물기리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얗게 쏟아지는 굵은 물줄기에 눈이 부셨다.  물의 양에 따라 낙차의 크기가 다르듯 홍수가 그친 뒤라 물은 힘이 넘쳐흘렀다. 수로水로路에 설치하는 수문은 수심水深유지를 위해 또는 역류를 방지하고 홍수를 막기 위해 유량流量을 조절한다. 댐은 물의 감옥, 강은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물 샐 틈 있나 틈을 찾아보지만 수문은 완고하다. 길을 막는 것이 어디 이뿐이랴. 작은 수문도 있다.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든 좁은 통로가 그것이다. 하지 후에는 못자리에 물꼬를 터서 물을 대야한다. 속담에 "하지를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논에 물들이는 것이 가장 기쁘다."는 말이 있듯이 가뭄 때는 물꼬 싸움도 일어난다. 작은 수문 하나가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다. 아래로 더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물은 억지로 길을 막으면 성난 파도와 같이 일어나 범람한다. 흐르는 것은 흐르게 두어야한다.

 5.  끝문

 그 문은 맨 마지막에 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끝문은 수시로 열리고 닫힌다. 언제 그 문이 열릴는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고 또 문이 열리는 날짜를 모르니 오히려 편안하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삶의 경주는 지루한 마라톤이 되기도 하고 단거리에서 허무하게 끝나기도 한다. 평생을 거쳐야 하는 많고 많은 문을 통과해 달리고 달려가면 마침내 죽음이라는 문 앞에 당도한다. 어떤 시인은 문상을 가는 것을 저승의 신생아로 태어날 亡人을 축하하러 가는 길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죽음의 뒤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어떤 별천지가 있을까? 마지막 문을 통과하면 이  고통도 끝나리라,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뒤편을 동경하며 스스로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처음과 끝, 삶과 죽음은 앞과 뒤가 다른 양면의 문을 가지고 있다.

 6. 마음의 문

 문중에서도 가장 열기 힘든 문이 마음의 문이다. 몸은 열리기 쉬우나 몸을 붙들고 있는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마음엔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기억의 연속이거나 한 순간의 정지가 아니던가. 아픈 기억이 오래 머물면 상처로 굳어지고 마음의 문에 빗장이 걸린다. 내게 고스란히 상처였던 사람, 한때 내게도 파문이 일었다. 그 떨림을 고요히 견딘 적이 있다. 마음의 첫문을 열고 필생의 힘으로 나를 흔들던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랜 기다림으로 기억되는 처음은 이제 하나의 파문으로 사라졌지만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왔는지 

    -「 문 」전문

7.  문의 열쇠

 두꺼운 얼음 강은 한뎃잠을 자는 물고기들에게는 방한복이라고 했던가. 강이 열리는 시기에 봄이 온다. 얼었던 강의 문을 따는 열쇠는 봄이다. 강물이 풀리면 물고기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물고기는 알을 낳고 강은 물고기들의 밭이 되어 치어를 기른다. 강의 열쇠를 쥐고 있던 봄의 손은 얼마나 따스한다? 결빙된 강의 문은 훈기에 스르르 풀린다. 강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강은 마음껏 너울거린다. 물고기들의 산란에 강물에서 비린내가 나고 엎드렸던 강이 꿈틀거린다. 새소리도 바다를 건너오고 강가에 뒹굴던 메마른 돌도 말간 물소리에 얼굴을 씻는다. 강물을 받아 안은 바다도 푸르게 넘실거린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갯돌 하나를 주워 왔다.

 물이 마르자 꽃이 사라졌다. 따글따글 돌 구르는 소리, 물새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저 주먹만한 몽돌의 나이는 아무도 모른다. 흐르고 흘러먼 섬에 닿았다가 수천 년 파도에 굴렀다. 어느 바람이 손이 헐도록 바위를 쪼개고 다듬어 둥글었다. 따글따글 물에 부딪혀 모단 성질 다독여, 꽃을 피웠다.

 그냥 두고와야 했다. 저 돌멩이가 바다의 살점인 줄 몰랐다. 얼마나, 천천히, 천천히 … 품고 어르고 한 숟갈, 두 숟갈, 짠물을 떠 먹여 키웠는지 미처 몰랐다. 그 아름다운 돌무늬가 돌의 마음이었다.

물이 마르니 마음도 거두어 갔다. ​

  -「 돌꽃 」전문

 8. 좁은 문

 

 문중에 가장 힘든 문은 좁은 문이다. 과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까? 구원의 문은 좁고 험하여 좁은 길은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넓은 길은 편하지만 사망의 길이라고 하니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운명이다.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 앞에 저당 잡힌 목숨 아닌가. 한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려면 어미의 좁은 산도를 거쳐야 하고 어미는 목숨을 걸고 몸을 연다. 열 달을 기다리다가 자궁이라는 문을 통과할 때도 그 어린것도 온 힘을 다한다고 한다. 첫 관문을 무사히 빠져 나와도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승진 등등, 많은 문이 기다리고 있다. 열쇠가 없는 문은 얼마나 완강한다. 문을 닫은 폐광과 임대료가 밀린 가게와 깨진 사랑과 벽 너머의 세상을 넘보던 청년과 저승의 문을 열고 들어가신 할머니는 모두 열쇠를 잃어버렸다. 닫힌 문 앞에서, 떠나버린 마음 앞에서 울던 기억이 난다. 한때는 유일한 출구였던 사람이 내게 가장 좁은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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