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소나기 때문이었다 / 조정은
그건 소나기 때문이었다
조 정 은
종각 사거리에 위치한 내 가게는 보석 전문상가로 거리로 향한 양면이 유리로 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밤낮없이 할로겐을 눈부시게 밝히고 지나는 행인들이 물건을 사러 들어오길 기다려야 했다. 그 날은 여름휴가철인데다가 일요일이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은 셔터를 굳게 내리고 겨우 몇 군데 음식점만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진열대에 서서 하릴없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둔 거리 풍경은 무성영화처럼 조용한 가운데 움직이고 있었다. 먹장구름이 아스팔트까지 내려와 어두운 기운이 스멀거렸고 차들은 속도를 내어 쌩쌩 내달렸다. 어쩌다 지나는 행인들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발걸음이 빨라 보였다. 느린 것보다 빠른 게 더 조용하고 허전할 때가 있다. 이 도시에선 그게 비어 있음이다. 신호등에 걸려 잠시 서 있다간 쌩 하고 내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감이 오히려 적요했다. 문득 나는 유리 상자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행인 누구도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환하게 불을 밝혔어도 그 환한 불빛마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기지개를 켜고, 어두운 거리를 향해 버럭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통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거리로 장대비 몇 가닥이 화살처럼 날카롭게 내려 꽃이기 시작하더니 이어 순식간에 억수 같은 빗줄기가 길바닥을 강타했다. 비화살은 바닥에 꽂히자마자 산산이 부서졌고 부서진 파편들이 반동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주얼 박스 틈새로 보이는 비 오는 광경은 공포감이 들 지경이었다.
전화를 끊고서 본격적으로 비 구경을 하려고 일어서며 고개를 들었을 때, 진열장을 사이에 두고 그가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가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다. 행색이 가관이었다. 얼굴은 불에 덴 듯 여기저기 붉은 반점이 피었고 반점 사이로 버짐이 하얗게 살갗을 들고 일어났다. 충혈된 커다란 눈엔 노란 눈곱까지 덕지덕지 끼었다. 그는 잠시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굽혔는데 그게 인사인지 뭘 구걸하는 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동전 두어 닢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손사래까지 치며 정색을 하고 그것을 받지 않았다. ‘도대체 뭐야! 주제에 동전은 싫다는 겨?’ 속으로 투덜대며 천원 권 한 장을 꺼내려고 금고 서랍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 같은 게 거칠게 쏟아져 나왔다. 나는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영문을 몰라 다시 허리를 펴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얘긴지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심사였다. 자세히 보니 진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일단 한쪽 콧구멍에서 흘러나온 콧물은 윗입술에 위태롭게 걸려 숨 쉬는 대로 느린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큰 삼각진 머리통엔 머리카락이 검불처럼 뒤엉켰고 게다가 정수리부터 양쪽 귀밑까지는 반원형으로 백고를 쳤다. 마치 변발한 몽고인처럼. 그 반원형의 백고 친 머리통에는 쭈글쭈글한 흉터가 있었는데 마침 새살이 돋고 있는 중인지 윤기가 번들거리며 유난히 빨갛게 부풀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의 눈이었다. 거의 개복숭아 만큼 큰 눈자위 한가운데 왕포도알만한 갈색눈동자가 그득 차 있었는데, 바랜 듯한 그 눈빛은 뜻밖에도 천진난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천진한 눈빛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내 눈 속을 파고들었고 나는 얼떨결에 우두커니 그 눈을 마주보았다.
침묵 속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그의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가 싶었는데 그 움직임을 타고 콧물이 입으로 흘러넘쳤고 동시에 눈에서는 눈물까지 주룩 쏟아졌다. 그는 눈물보다는 콧물을 우선 수습했다. 빨간 손등으로 능숙하게 코 밑을 쓱쓱 문질러 귀 쪽으로 주먹을 당긴 후 볼대기에 나머지를 치댔다. 그런 다음 으악,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면서 관심을 보이니까 그는 자기 의사를 전달하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몇 번인가 되풀이 되어 겨우 알아차린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자기는 평생 동안 선물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선물을 받아 보는 게 소원이라는 거였다. ‘어머머, 진짜 미쳤나봐. 내가 왜? 내가 왜 당신에게 선물을 줘야 하지?’ 나는 그가 손짓 발짓을 하며 더듬거리는 말뜻을 얼핏 알아차리자 벌컥 짜증이 났다.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 안타깝게 나를 가리키더니
“이쁜 아줌마, 이쁜 아줌마한테”
라고 했다. 내가 왜 그에게 선물을 주어야 하느냐면 그것은 내가 이쁘기 때문이었다. 히야, 딴은 그게 요령을 피운 것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쁘다는 말에 그만 짜증나던 마음이 슬슬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상인이 말하는 이쁘다는 칭찬과는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쁘다는 건 내 겉모습보다도 마음을 본 거야. 그래 내가 좀 착한 데가 있긴 하지’ 또 하나의 내가 그럴듯한 해석까지 곁들이며 내 기분을 부추겼다.
그러나 명색이 금은방인데 느닷없이 나타나 선물을 달라고 떼를 쓰는 그에게 만만하게 집어 줄만한 물건은 없었다. 서랍을 뒤적거려보니 비주얼박스에 디스플레이하려고 얻어다 놨던 은 목걸이가 손에 잡혔다. 마침 금으로 도금까지 해 둔 터라 그럴듯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길고 굵은 것으로 한 줄 골라 목걸이 케이스에 담았다. 케이스에 담고 보니 꽤 그럴 듯 했다. 내친김에 이왕이면 포장까지 멋들어지게 해 주어야겠다 싶어서 포장지로 싸고 고급 실크 리본으로 꽃까지 만들어 달았다. 한껏 포장에 멋을 부리면서 나는 자신의 그런 관대한 포용력과 자비심에 스스로 반해 마음이 들떴다. (아마도 나는 이쯤해서 진묵 대사의 누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진묵대사가 가난한 누이에게 복을 주려고 거지꼴을 한 신장들을 데리고 누이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녀는 알아보지 못하고 투덜대며 자기가 정성들여 차린 음식을 거지들이 먹어치우는 것을 아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복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던가. 나는 그렇게 어리석어선 안된다. 요새 경기는 바닥을 치고 있고 뾰족한 대책도 없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치성을 드려보는거야. 혹시 알아? 홉으로 주고 로또라도 당첨될지, 하면서 속으로 흠흉하게 웃었을 지도 모른다. ) 허리를 펴고 두 손으로 그것을 과장되게 받쳐 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조금 흡족한 듯 입을 실룩거리며 헤실거리는가 싶었는데
“싫어. 그거 여-여-여기다가…”
라고 하면서 때가 꼬질꼬질한 모가지를 길게 빼고 손짓으로 목에 거는 시늉을 했다. 나더러 직접 자기 목에 걸어달라는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상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려 있었다. 그동안 내 멋에 겨워 의식하지 못했던 그들의 눈총이 갑자기 따갑게 다가왔다. 나는 당황했다. 서둘러 포장을 풀고 목걸이 케이스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면서 소리쳤다.
“직접 하세요. 난 못 걸어줘.”
빨리 그가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목걸이를 케이스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목걸이 고리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진열대 위에 주르륵 흘리곤 하다가 간신히 목에 걸고 고리를 채웠다. 거울을 보여줬다. 나름대로 만족한 듯이 우물쭈물 목걸이를 쓰다듬으면서 좌우로 돌려보더니 이번에는 또 눈을 반짝이며 진열장 위에다 올려놓은 반지 매대로 다가갔다.
“으으으. 이-이거. 이거 하나만…”
반지를 달라는 것이었다.
‘내 원 참, 분다분다 하면 매운재를 석 섬이나 분다더니, 이런 경우 없는 몰염치한 사람을 봤나.’ 나는 짜증이 나서
“그건 안돼요.”
라고 소리치면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반지틀에서 큼직한 알반지 하나를 뽑아 들더니 자기 손가락에 끼려 들었다.
호통을 치거나 만류를 해서 될 일이 아닌 듯 했다. 더구나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서 벌써부터 가슴 속이 벌렁거렸다. 하는 수 없이 제일 값이 허름한 14K 반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우선 그가 손에 든 문제의 반지를 빼앗았다. 그는 또 떼를 썼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손으로 가리켰다.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나도 모르게 반지 케이스를 번쩍 들어 유리 진열대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는 젖은 눈으로 간절히 나를 바라봤다. 가슴은 더욱 벌렁거렸지만 왠지 나는 그 눈빛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고 안쓰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운수가 나쁜 게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꼭 물건을 살 만한 손님은 옆집으로 가고 이런 사람들만 용케도 알고 나를 찾아온다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걸 이웃 상인들의 눈총쯤 모른 척해야지, 하는 배짱이 생기면서 이왕 빼어 든 반지니 그에게 다시 한 번 더 권했다. 무슨 오기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상처투성이인 시뻘건 손가락에 그것을 꼭 끼워 주고 싶어졌다. 그의 손을 끌어다가 반지를 끼웠다. 피부는 몹시 거칠었지만 따듯한 기운이 배어나왔다. 손가락이 굵어서 약지에 들어가지 않았고 겨우 새끼손가락에 빠듯하게 들어갔다. 그는 그제야 아주 만족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옳지 이젠 가겠구나.’ 안도하면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니었다.
그는 갈 생각이 없었다.
“으으으종이 조-조-종이…”
종이를 찾았다. 무슨 종이를 찾는 것일까? 얼른 티슈를 서너 장 뽑아 들었다. 그는 또 손사래를 세차게 치면서 도리질까지 해대었다. 메모지를 한 장 내밀어 보았다.
“으으으, 킁 거”
아예 내가 쓰던 노트의 빈 쪽을 펼쳐서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싸인펜을 달라고 필기구 통을 가리켰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잠시 후 내가 내민 검은 싸인펜을 받아 든 그는 검지를 혀에다 대고 침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을 바른 손가락 끝에다 싸인펜을 문질렀다. 마치 벼루에 먹을 가는 것처럼 같은 동작을 여러 번 하더니 이윽고 손가락을 붓처럼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트의 중심을 축으로 양쪽에 두 개의 반원을 끝이 날카롭게 손끝으로 그리더니 몸을 곧추 세우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그것을 내려다봤다. 거기에 싸인펜으로 이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달마도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림은 완벽한 구도였고 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잠시 후 그는 그림의 좌측에는 一切唯心造 우측에는 佛心이라고 초서체로 휘갈겨 썼다.
나는 놀라서 엉겁결에 합장을 했다. 스님이셨던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자세히 보니 차림새는 초췌해도 걸친 옷은 회색 장삼이었고 겨드랑이 밑의 바랑에는 옻칠을 한 빨간 죽비가 비죽이 꽂혀 있었다. 나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손을 뻗어 그의 바랑에 꽂힌 죽비를 뽑아 들었다. 그림을 그리던 그가 반가운 듯 히죽 거렸다.
“이거 뭐예요?” 라고 내가 물었다.
“어-어-내가 깎았어. 크-으-킁 슴(큰스님)이 주으윽- 죽-비만 깎으랬어. 매-애-앤 날 죽비만 깎았어.”
그는 절 뒤란에서 죽비를 깎았고 큰 스님은 뒤란으로 난 쪽문을 열어 둔 채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어느 한때 그랬다는 것인지, 큰 스님이 돌아가시도록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지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열반하셨다는 것이다.
“난 또- 또-오, 그-으-으-러-어니까, 크-으-응 슴, 차-아-아차-자-가야 해. 저-저-얼, 절 사람들이 나-아-아 보고 킁 슴 따-아-아-라-아가-아-래.”
그는 그러니까 큰 스님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절 사람들이 그에게 큰 스님을 찾아가라고 했다는 거였다. 이런 바보, 저승으로 간 큰 스님을 찾아서 이승을 떠돈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진지했다. ‘킁-슴, 찾아가야해’를 연발하면서 확신에 차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확신에 찬 진지한 눈빛 때문에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라도 나서서 그가 큰 스님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내 마음속을 스쳐 간 소망들, 때로 불길처럼 일어났다가 한 순간 잿더미가 되어 주저앉고 말았던 그 무수한 바램들, 그건 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던가. 그렇다고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소망을 이루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꿈꾸던 빛깔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당혹스런 불완전한 빛깔 때문에 꿈의 완전한 빛깔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허망한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은 그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니다. 나는 만나지 못한 것을 그는 만날지도 모른다. 그가 큰 스님 육체의 겉모습만을 찾는 게 아니라면 무수한 큰 스님을 찰나찰나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는 꽃에서도 바람에서도 저 소나기 속에서도 큰 스님을 만나고 있을지 모른다.
빨간 죽비는 세월의 때가 켜켜이 앉아 고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죽비의 표면에 내 흔적을 조금 더하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손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보이진 않지만 미세하고 부드럽게 굴곡진 표피의 능선들이 손바닥에 스쳤다. 그것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엎드려 다시 그림을 다듬는 그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띵-, 내가 기우뚱 흔들린 것인지, 세상이 기우뚱 흔들린 것인지.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아주 먼 세계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아니 그와 함께 내 자신이 시간 밖, 낯선 우주공간 어디쯤으로 갑자기 내던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시간의 중심축이 뒤흔들리며 주변 풍경이 아득하게 퇴색하며 멀어졌다. 아주 짧은 찰나, 모든 게 현실 밖의 세상으로 밀려나갔고 나는 형체 없는 존재로 그곳에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어떤 기억의 잔상 같기도 했다. 꿈길로나 찾아오는 아주 먼 기억의 잔상.
햇살이 내리쬐는 토방에 쪼그리고 앉은 사미승은 낫으로 대나무를 다듬고 있었고, 쪽문을 열어젖히고 방안에 앉아 화선지에 붓질을 하다가, 간간히 사미승을 내다보곤 하는 노스님의 모습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가물거리다가 이윽고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결코 낯설지 않은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었다. 아니 언젠가 나는 그곳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던 것만 같았다. 뒤란으로 내려서기 위해 만들어진 야트막한 토방과 창호지를 곱게 바른 작은 쪽문뿐이었지만 나는 그곳을 익히 알고 있다.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내게 내밀었을 때에야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나는 그림을 도로 그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면서 청했다.
“스님 법명이라도 적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더듬거렸다.
“글씨. 그-그으-글씨 난 몰라”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달필로 한문을 멋들어지게 휘갈겨 놓고선 글씨를 모른다니. 난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시 싸인펜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펜을 쥔 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떨면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그림의 밑에다가 가로로 미숙하게 한 자 한 자 더듬거리며 ‘불기 2547년. 혜각’이라고 썼다. 괴발개발 쓴 글씨는 그림과는 동떨어지게도 힘없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림을 받아 들고 한참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유난히 눈빛이 형형한 달마가 근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쓰인 ‘일체유심조’나 ‘불심’은 글씨가 아니라 달마의 표정이거나 또 다른 법의일 뿐이다. 마치 꿈을 꾼 듯 했다.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비가 멎어 있었고 그는 장삼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며 음식점을 끼고 돌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웃 상인들이 일시에 웅성거리며 내게로 몰려들었다. 앞 가게 사장이 큰 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아니 그 비싼 것을 그런 거지에게 주면 어떡해? 정신 나갔어?”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반지틀을 꺼내어 빈 틀만 연거푸 닦았다. 그랬다. 나는 잠시 미쳤던 게다.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서는 달마도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서랍을 열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