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와 동그라미 / 최장순
네모와 동그라미
최장순
흐트러진 침대, 굽은 잠을 일으킨다. 이불 한 채를 젖히고 문을 찾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거실로 나간다. 벽에 걸린 액자 아래 소파에서 남은 잠을 털어내고, 잉크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문을 펼쳐 어제의 사건 사고와 대면한다. 침대, 이불, 문, 거실, 액자, 소파, 신문…. 네모 속에서 또 하루가 시작된다.
서로 다른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똑같기를 강요받는 네모의 구도. 사각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사각 진 엘리베이터에 타고 네모를 접어놓은 계단을 내려가 다시 네모난 자동차속으로 들어가며 생각한다. 왜 나는 한 번도 네모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네 개의 변과 네 꼭짓점을 벗어날 수 없는 일상. 명함, 지갑, 책, 컴퓨터, 서랍 등 네모와 관련된 일상을 열거하려면 끝도 없다. 언제나 유행과 무관하게 우리 곁에 있는 네모. 기상천외한 것들로 가득 차있는 휴대폰마저도 네모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변의 흔한 사물들이 삼각형이거나 원형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공세적인 세모나 두루뭉술한 원에 비해 사각이 주는 안정감과 단순함에 나는 길들여져 있다. 종이나 천을 잘라보면 다른 모양과 달리 네모는 자투리를 남기지 않는다. 지갑 속의 신용카드도 1:1.6의 황금비율이다.
네모는 움직임이 용이하지 않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하기에 돌출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 안정감을 주기에 부주의로 흘리지 않은 이상 스스로 장소를 옮겨가는 일은 없다. 제 모서리를 마모시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으니 네모가 스스로 자리를 벗어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층과 2층 사이의 여유 공간에 턱을 만들어 자전거를 올려놓은 건물을 본적이 있다. 대문과 창문의 각지고 고착된 시각을 부드럽게 표현해보고 싶은 건물주의 마음이거나 취향에 따른 조형이었을 것이다. 영화 ET의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떠올렸다. 바퀴는 생기를 부여한 움직이는 창조물, 금방이라도 주인공 엘리어트가 창을 열어 그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을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자전거 한 대가 높이와 벽과 각이 존재하는 도시의 삭막함을 덜어내고 있었다. 그 자전거 바퀴가 만약 제 맘대로 굴러간다면 얼마나 위태로울까. 그래서 페달이 필요한 것, 속도조절을 할 수 있는 손수레나 굴렁쇠처럼 제어가 필요하다. 자동차의 과속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한다.
경직된 네모에게는 부족한 감성을 담을 수 있는 동그라미의 도움이 필요해서일까, 네모난 본체에 동그란 렌즈가 잘 어울리는 카메라는 사각의 균형 잡힌 완전체에 원형의 완벽함을 보태 현장을 고스란히 복원해낸다. 가장 기본적인 두 개의 도형, 네모와 동그라미가 협업과 분업으로 서로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결과물은 네모다. 아무리 세상을 둥근 눈으로 보고 둥근 셔터를 눌러도 언제나 사각에 담긴 풍경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동그라미와 네모의 어울림은 병영생활의 식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견고한 내구성에 세척의 용이함까지 갖춘 은빛 사각식판. 우묵한 동그라미의 수만큼 한정된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차가운 스테인리스 판에 찍힌 둥근 모성의 온기가 상명하복의 각진 일상을 둥글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따끈하게 구워진 둥근 피자가 네모박스에 실려 배달되는 것처럼.
둥긂과 네모남이 어우러지는 바둑과 장기는 놀이 도구이자 삶의 축소판이다. 흑백의 돌과 청․홍의 기물棋物로 겨루는 전술은 마치 인생사의 전진과 후퇴를,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전략과 지혜를 일깨워준다. 일등과 꼴찌, 승리와 패배, 삶과 죽음을 일곱 살 손자에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둑을 통한 겨루기에서는 어렵지 않다. 녀석의 볼멘 투정도 기꺼이 받아줄 인내심만 있다면 말이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내게 바둑을 가르쳐 주었다. 온전히 한 판을 마친 기억이 별로 없다. 도중에 바둑판을 쓸어버리는 내 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나를 붙들어 앉히고 바둑을 마치게 하셨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네모진 바둑판에서 아버님이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오늘날 가장 힘 있는 네모는 인터넷 검색창이 아닐까 싶다. 포털사이트 상단의 장방형 백색 빈칸, 깜박이는 커서는 검색어를 재촉한다.
“무엇이든지 물어봐”
세상과 만나는 열린 문이라 치켜세우기도 하는 네모난 창,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실시간 쏟아낸다. 사유하지 않아도, 책을 읽지 않아도 컴퓨터와 스마트폰만 있으면 해결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보의 왜곡으로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파워블로거의 횡포는 만능검색창을 불안한 네모로 만들기도 한다.
네모에 갇혔다가 네모와 함께 일상을 보내고 다시 네모로 돌아가는 생이다. 하지만 네모는 생명의 원초적 이미지인 동그라미와 함께일 때 마무리된다. 생명의 시작과 끝에는 원형의 반복적 순환이 따른다. 둥근 공간에서 창조된 생이 삶을 다하면, 못질한 네모의 목관에서 네모진 화덕을 거쳐 원형의 무덤이나 항아리에 안치된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네모와 원형이 함께 만드는 또 다른 세계로의 귀향이다.
네모이거나 동그라미이거나, 세상은 서로 고집하지 않는 속에서 스스로 각이 지거나 마모되어 굴러가는 것이 아니던가.
-<수필과 비평> 2015.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