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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다리와/ 김귀숙

희라킴 2016. 4. 8. 12:11


오징어 다리와


김귀숙



  눈을 뜨니 한낮인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마음이 뒤숭숭해 아침녘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던가 보다. 집 안을 감싸고 있는 옅은 향기, 딸들이 방금 외출한 모양이다. 괜히 울컥 마음 한켠이 시려 온다.

 

 아들까지 잘 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날은 가끔 집 안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도 그랬다. 그 불똥이 외출을 마치고 귀가할 때까지 자고 있던 딸에게 튀었다. 모질게 몇 마디 퍼붓자 딸은 부스스 일어나 말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늦은 밤 제 언니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곤 오늘도 나가고 없다. 무언의 저항이 날선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더 쓰라리게 한다.

 

 이태백이니 이구백이니 하는 말이 남의 일인 줄 알았더니 내 집안에 생기고 보니 청년실업의 심각성이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온몸이 무기력하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선 빈속이나 채울까.

 

 냉장고 문을 여니 오징어의 롱다리가 보인다. 부산 조카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오징어다. 오징어를 좋아하는 제 이모를 볼 때마다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주던 속 깊은 조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뜻해져 온다.

 

 롱다리는 반 뼘 정도로 잘려서 가지런히 세워져 손바닥만 한 봉지에 들어 있다. 그다지 식욕도 없다. 손에 든 채 비닐 포장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제품명; 오징어 롱다리

      식품의 유형; 조미 건어포류

      원산지; 페루

      제품가공; 중국

 

 “너도 참 멀리서 먼 곳을 거쳐서 나에게까지 왔구나.”

  중얼거리며 봉지를 뜯는다. 토막 난 다리들이 바싹 마른 장작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티고 서 있다. 여기까지 오려면 물기 가득한 상태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으리라.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고 깨물어 본다. 강한 저항!

 

 “그래 그렇게 쉽게 굴복하면 안 되지. 여기까지 오기 위해 피를 말리는 고통을 참고 왔을 텐데 말이지.”

  이럴 땐 나도 그들의 노고를 알아 줘야 한다. 앞니로 물고 혀로 쓰다듬으며 살살 달랜다. 한참을 그들이 놓고 왔던 물기를 넣어 주면 그제야 빳빳이 세우고 있던 자존심을 내려놓는다.

 

 그제서야 나도 롱다리를 조금씩 혀로 원을 그리면서 입 안에 넣고 씹기 시작한다.

 

 다리를 다 몰아넣은 다음에도 단번에 힘껏 씹다가는 이빨이 그의 저항에 다치기 십상이다. 조심스럽게 잘근잘근 씹어 주며 깊은 맛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입 안에 번지는 콤콤한 냄새마저도 단맛과 어울려 깊은 바다 속으로 나를 끌어 들인다. 넓은 바다를 유유자적하다가 박제된 몸으로 돌고 돌아 내게까지 온 오징어의 고난의 세월도 내 몸으로 녹아내린다. 우주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느새 입안의 물체는 사라지고 비릿한 체취만 남는다.


 새로운 다리 한쪽을 다시 입에 물고 무심코 꽉 씹는다. 뿌드득 이빨이 자지러진다. 자고 있던 정신들도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그래, 기다리는 거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인 것을,”

  그제서야 무거웠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