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의 수필 작법’에 대하여 / 최민자
최민자의 ‘ 나의 수필 작법’에 대하여
- 2010.2.26 백록수필 제 10 집 출판 기념 문학강좌 -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란 대답으로 원고지와 잉크와 펜을 준비하라 한 다음 그저 죽어라 써야 할 뿐이라 했습니다. 시인 박목월도 시를 잘 쓰려면 잠잘 때도 먹을 때도 뒷간에 가서도 오로지 시만 생각하라 했습니다. 왕도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수필은 오늘 제게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필이 아니라면 오늘 여기에 날아올 일이 없엇을 테니까요. 오늘이 아니라도 수필은 제게 삶의 날숨 같은 것입니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불안, 미움, 질투, 그리움, 사랑과 같은 무질서의 세계와 밝은 바깥 세상을 소통시키는 작은 봉창 같은 것이기도 하지요.
누군가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을 수필이라 정의 했듯이, 나라는 개체와 함께 소멸되어버린 또 다른 소우주를 묵묵히 파들어가야 되는 고단한 수작업이 수필 쓰기일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혼의 작업입니다.
수필을 쓰기 위한 평소 제 밑 작업은 독서와 메모(적바림)입니다. 작가에게 독서는 사유의 폭을 넓히는 장입니다. 좋은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원료가 있어야 합니다. 신문 칼럼, 또는 인터넷 정보뿐 아니라 인문학, 건축학, 물리, 음악 등 다방면의 책을 두루 섭렵하는 편이 좋습니다. 생각은 마치 순간의 거품과도 같아 그때 그때 잡아두지 않으면 금세 어디론가 거저 다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짧은 단상, TV나 신문의 유익한 정보, 기억해 두면 좋은 숫자 같은 것들도 메모하여 적바림 파일에 저장합니다. 때로는 신호등 앞에서까지, 특히 산책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처럼 글은 팔이 아니고 다리로 쓰는지도 모릅니다.
수시로 업데이트한 파일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생각이 덧붙어지기도 하고 포개지기도 합니다. 글쓰기는 마치 퀼트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생각의 조각을 이어서 만드니 말입니다. 모든 씨앗들이 다 싹을 내는 게 아니듯 대부분의 씨앗들은 떡잎도 못 내고 시들어버리고 말지만 씨앗들을 자꾸 더블 클릭하다보면 어느새 가슴으로 이식되어 일상의 계기와 만나 싹이 트고 꽃을 피우지요. 이번에 쓴 ‘눈 내리는 날의 모노로그’ 도 쓰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퇴고는 며칠 더 걸렸습니다) 그것을 쓰겠다 생각한 것은 일 년도 더 전이었습니다. 정신과 육신이 함께 늙어가지 못하는 중년의 모습을 쓰고자 했는데, 그 눈 오는 날 치과에서 의사의 말 한마디에 필이 와서 그날 밤 완성했지요. 그러므로 생각이 무르익으면 표현의 욕구가 올라오고 그러다 보면 일상의 어느 순간 계기가 찾아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면 얼굴에 눈 코 입과 모든 기관이 분화되어 가는데 열 달이 걸리듯 글도 가슴 속에 공글려지며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 모종을 고르는데 있어서, 즉 주제를 정하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 독자와의 공감대를 비중 높게 생각합니다. 나와 독자와 작품이 하나 되는 공감대, 그 교집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변잡사에 그치거나 한풀이식 넋두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수필이 사사로운 개인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인간 보편의 공감대를 끌어내야 합니다. 누구는 글쓰기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라고 했습니다. 자기안의 물을 퍼내다 보면 개인의 한풀이가 되기 마련, 독자의 마음에 작은 느낌표 하나라도 남기려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가 생겨나면, 구체적인 이야기는 추상적으로, 추상적인 주제는 구체적으로 푸는 것이 독자에게 더 잘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사랑이라는 추상어를 관념으로 푸는 것보다는 내가 간직한 애틋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듯이 말입니다. 경박한 느낌이 들면 진중한 사유를 행간에 숨기고 무거운 주제는 가벼운 필치로 기술하려 애씁니다. 수기 같다면 구성을 달리하여 비틀어 보고, 작가의 사유를 중간 중간에 넣습니다. 수필은 이야기보다는 느낌이나 향기, 여운이 중요합니다. 물론 크로키나 뎃셍이나 수채화처럼 묘사로만도 산뜻한 글이 되기도 합니다.
서사에 대해서 괴테는 ‘나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것을 하나도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고 했습니다. 나는 사적인 이야기보다는 사물이나 대상 같은 것을 주로 씁니다. 사실 수필은 인간의 이야기이므로 사람 이야기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쓰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역량이나 경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글은 자신의 한계입니다.
큰 재능은 축복이지만 때로 작은 재능은 삶의 올무가 됩니다. 뜨거운 감자처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며 그 것이 질질 끌려가느라 다른 삶을 즐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검정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래도 빛이 보이는 법. 어둠을 오래 응시하면 사물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세상의 사물들은 그 자체로 은유이거나 기호인 듯합니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말해 달라고 애원하듯 보입니다. 석수장이가 바위에서 부처의 대자대비한 미소를 건져올리듯 작가의 머리 속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대상과 나 사이의 침묵의 의미를 파악해 내고 그 침묵으로 말하게 하는 것.
그렇게 태어난 초고는 이제부터 퇴고가 관건이므로 퇴고를 오래 여러 번 해야 합니다. 글을 깁기도 하고 도려내며, 덜어내는 퇴고를 어느만큼 했느냐로 심미적 완성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퇴고의 첫 번째, 말 덜어내기, 즉 가지치기로 다이어트를 시킵니다. 중복어, 수식어 등도 그렇습니다.
문장에선 단어, 토씨 하나도 적확해야 합니다.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적확한 어휘는 단 하나 밖에 없지요. 은, 는, 이, 가는 주격조사지만 다 쓰임새가 다르지요. 문장에선 리듬이 필요합니다. 생로병사에도 리듬이 있고 하루 안에도 리듬이 있듯이 그것은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압니다.
수필은 말을 벗어나야 하고 또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말이 성하면 여운이 없어집니다. 말이 밋밋하면 읽는 맛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글 한 편을 통틀어 적어도 한두 군데쯤 머리를 통 튕겨주는 참신한 사유나 기발한 표현이 있어야 읽는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카프카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글이 아니라면 읽을 필요가 있는가 했습니다.
글에도 화장이 필요하지요. 건축의 감성이 인테리어인 것처럼 참신한 시어를 삽입하면 글 전체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거나 다른 책을 읽다가 꼭 필요한 어휘를 얻습니다.
무엇이건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무엇인가를 잘 하는 사람보다도 즐길 줄 아는, 즉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글도 잘 쓸 것 같습니다.
출처:백록수필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