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恨]은 보랏빛 / 천경자
한[恨]은 보랏빛
천경자
동네 친척 집에 경사가 나 타관에서 새색시가 온 날이면, 어머니 장롱 속에 들어 있던 남색과 적색 치마가 꺼내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어느 새색시는 단속곳 위에 남치마를 두른 다음 그 위에 붉은 치마를 다시 두르고, 노랑 저고리를 맞춰 입고 어디선가 빌려 온 원삼 족도리를 걸고 차일 밑에서 폐백을 올렸다.
모란 무늬가 띄엄띄엄 새겨진 갑사 치마는 속이 비쳐 보여서 멀리서 보면 남빛과 붉은 빛이 합쳐져 깊은 샘 속에 깔린 신비한 보랏빛으로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보랏빛은 어딘지 한과 인연이 있는 빛깔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잘롱 속에서 들려 나갔다 돌아온 치마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던 날 입었던 치마였다. 앞 이마 위의 머리가 유독 허옇게 센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가 누워 계신 방으로 들어가,
“엄마, 그 엄마 시집올 때 치매 말이시, 남치매, 붉은 치매 있었제. 저구리는 안 보이는디 노랑 저고리였소?”
물어 보았다.
“배추색 저구리에 반호장이제.”
상상만 해도 울고 싶도록 곱고 아름다운 빛깔들이다. 지금 어머니의 목소리는 삭아 가라앉았고 내 목소리 역시 어느덧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어린 시절 집 안에 울려 퍼졌던 엄마의 소리는 정말로 곱고 아름다운 보랏빛이었다.
어느 초가을.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 목이 말라 “아부지, 물 묵고자와---.” 하며 울상을 지었다. 아버지는 이것 야단났다는 듯 주위를 휘이휘이 훑어 보고는 ‘옳지’하는 표정으로 물외밭에 달려가 노오랗게 센 씨오이를 따서 ‘톡칵’ 분질러 주면서 “아나, 이 국물을 빨아 묵어라.”목을 축여주셨다. 그 빛깔--- .
내가 자라자 우리 집은 몰락했고, 해방과 6.25, 나의 불행한 결혼에 이어 여동생의 죽음을 차례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약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보호해주던 혈육은 그렇게 하나들 세상을 뜨고 지금은 어머니와 동생만 남아 있다.
한이란---. 깊은 우물 속에 깔린 듯한 신비한 보라색. 파란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분위기, 홍두깨에서 돌돌 풀려 나온 빛깔. 다듬이방망이 소리, 신경질이 섞여 화사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흥타령 곡조, 이제는 삭아 가라앉은 소리, 무턱대고 야산을 걸어 헤치느라 풀 밟는 소리, 그리고 그 빛깔과 소리에서 어슴푸레 느껴지는 그 무엇인 것 같다.
그러나 진실로 한이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슬픈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서 사라진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고 내 영혼은 어디에서 와서 한편생 살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