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든 일곱 / 김덕임
여든 일곱
김덕임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여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한 달 만에 뵙는 어머님은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하신다. 밤새 이야기의 끈이 물레에 실을 잣듯 이어진다. 어머님이 점점 청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삼십 육년을 함께해 온 터라서 표정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다.
‘또르락 똑똑.’ 함석 처마에 떨어지는 밤 빗소리가 단잠을 걷어낸다. 하늘 가득 반짝이던 초저녁의 별들은 간 데 없고, 희뿌연 창호지문으로 맑은 빗소리가 스며든다. 귀가 시원하다. 수원의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한밤의 멜로디다.
시골에 내려올 때마다 밤이 참 좋다. 보석처럼 뿌려져 있는 별들을 보면 머릿속은 물론 내장까지 청쾌해진다. 그리고 오늘처럼 뜬금없이 듣는 밤중의 호젓한 빗소리는 더께 낀 마음을 쇄락하게 헹궈준다.
천정에 매달려 우리 고부의 이야기를 같이 듣던 형광등은 긴 눈을 감은 지 오래다. 됫박만한 방안은 재깍거리는 벽시계 소리로 가득하다. 시계 소리와 장지문 밖의 빗소리가 장단을 맞춘다. 듣는 이 없는 한밤중에 이중주를 하고 있다. 갑작스런 밤 비를 피해 들어온 들고양이가 툇마루 밑에서 야옹거리며 한 소절을 보탠다.
어머님과 함께 보내는 이런 오붓한 날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어머님을 띄엄띄엄 뵐 때마다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다. 하지만 시간은 서산머리의 해처럼 달린다. 어머님은 여태까지 돋보기 없이도 바늘귀를 꿰었다. 이제는 눈이 흐리다며 실과 바늘을 내게 건네곤 한다. 그렇지만 어머님 가슴에는 항상 연초록 꿈이 있다. 새싹을 자식처럼 키우고 거두는 재미이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음 해에 심을 종자부터 튼실한 맏물로 골라 종이봉지에 담아둔다.
“엄니는 그 많은 씨앗을 내년에 또 심을라요?”
반백으로 성성한 남편이 농담으로 어머님을 툭 건드린다.
“하먼이제. 끼니 없는 흉년에도 종자는 머리 밑에 비고 죽었다제.”
“내년에도 산다면 좋은 씨앗을 땅에 또 디리고, 그 이쁜 것들을 키워서 거돠야제야.”
조금은 서운할 것 같은 아들의 농담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태평양 같은 어머님이다. 그런 어머님의 모습이 싸하다. 당신의 삶 한 편, 팔을 펴면 닿을 만한 곳에 죽음을 놓고도 평생 하던 대로 씨앗을 간직하는 어머님.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세상모르고 잠든 어머님의 얼굴이 천진스럽다. 마른 대추처럼 조글조글한 얼굴이 깻잎만하다. 단풍 든 깻잎…. 꼭 다문 입술에서는 팔남매의 이름들이 금방이라도 줄줄이 튕겨나올 것 같다. 어머니의 작은 키에 걸맞은 자그마한 발이 살구색 이불귀를 젖히고 올라와 있다. 작은 발이 시골 살림에 평생 얼마나 분주했을까? 구릿빛으로 그을은 작은 발.
열일곱 살에 시집올 때 쪽진 모습은 얼마나 앳되고 예뻤을까. 그 때 새색시의 풋풋한 냄새가 깊은 주름 사이에 골골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그 때의 솜털 뽀얗던 연지 곤지 볼에는 검버섯이 목단처럼 피었다. 지금은 갈퀴손이 되었지만 그때는 자그맣고 포동한 손이 얼마나 예뻤을까. 뽀송한 그 손으로 갖가지 십자수도 한땀 한땀 밤새워 놓았으리라.
어머님의 여든 일곱. 스물일곱 해가 지나면 내 모습도 지금의 어머님처럼 되겠지. 해가 갈수록 어머님의 모습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언뜻언뜻 내비치는 말씀 한 마디도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어머니의 일상 속에 들어있는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이름 모를 새들과 개구리, 그리고 텃밭의 각종 남새 등 자연 만물과도 이야기를 곧잘 하신다. 그런 어머님을 보면 사람이 곧 자연이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임을 쉽게 깨닫게 된다.
잠든 어머님의 까슬까슬한 손을 잡아본다. 온기가 뭉근하게 전해온다. 그리고 그 손은 나에게 소곤소곤 이른다.
“지금 니가 살고 있는 세월의 마디는 내가 자식들 뒷바라지에 여우살이 시키느라고 아등바등 살았던 시절이란다. 너도 심껏 살다보면 좋은 끝이 올 겨.”
사랑하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는 주님께서 어머님을 많이 사랑하시는가보다. 함석 처마를 두들기는 빗소리와 툇마루 밑의 들고양이 소리에도 아예 귀를 닫은 지 오래다. ‘곤히 잠든 시간만이라도 자녀들 걱정 다 내려놓으세요.’라는 한 마디로 늘 죄송한 마음을 대신한다.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여든 일곱의 내 나이. 깊이 잠든 어머님의 고랑진 주름 속을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