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랑출납부 / 반숙자
사랑출납부
반숙자
가계부는 수입보다 지출이 줄어들 때 슬기로운 주부가 된다지만 나의 사랑출납부에는 지출은 없고 수입만 많으니 나는 분명 알부자일 터인데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긴한 볼일로 먼길을 떠나와서 짐을 푸는데 가방 속에서 병이 나왔다. 짐을 쌀 때 넣은 기억이 없어서 의아한 채 비닐봉지를 풀었다. 한약이다. 시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글씁네 밤늦도록 불 켜 놓은 며느리 방 앞을 서성이며 몸 상한다고 걱정하시던 주름 깊은 어머니의 얼굴이.......
약병은 나에게 간절하게 차 오르는 고마움이었고 뉘우침이었다. 정성으로 다리고 정성으로 먹어야 효험이 있다며 새벽녘에 약을 다려 짜 넣어 주신 어머니의 사랑 앞에 내가 무슨 말씀을 올리랴. 비밀하게 간직한 사랑출납부에 오늘의 횡재를 기록해 둔다.
정에 욕심이 많은 나는 그 정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친정어머니가 안 계셔서 정 결핍증이라고 좋게 보아주시지만 엉뚱한 욕심은 때로는 어머니를 곤혹스럽게 한다. 손아래 시누이에 쏟는 어머니의 정성이나 남편에게 기울이는 지극한 사랑조차 부러워서 칭얼대고 투정하는 엉터리 며느리를 내색 없이 당신 마음가는 대로 보살펴 주실 뿐이다. 어언 스무 해 더 친해지거나 멀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의 자리를 지켜 오지만 저울추는 언제나 자식 쪽으로 기울어진다.
문학 심포지엄 공식 일정이 끝나고 나긋나긋 푸르르는 남녘의 봄에 취해 선운사로 달리는 시골길 옆에 어머니를 뵙듯 반가운 풀꽃을 본다. 무잎과 비슷하고 노란 꽃이 피며 대궁을 꺾으면 노란 진액이 나오는 애기똥풀꽃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 둘레에도 그 꽃은 지천으로 피어났다. 가끔씩 가족들이 내려가서 양념감을 심어 가꾸는데 지난해의 일이다. 오월은 ‘가정의 달’로 행사가 많으니 아무 데도 가지말고 온 가족이 함께 보내자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도 어머니와 우리 내외는 시골에 갔다. 초순께 가서 마늘밭을 매고 토란을 심고 어린이날 전에 돌아오기로 한 것이 일이 밀려서 지체가 되고 말았다. 씨를 뿌리는 일은 때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저녁을 짓다가 내일이 어버이날이란 것을 알고는 아차 싶었다.
우리야 괜찮지만 팔순 어머니의 어버이날은 의미가 각별할진대 시골구석에서 고기 한 칼 대접하지 못하고 카네이션 꽃도 달아 드리지 못함이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새벽 댓바람에 밭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씀바귀를 캐고 지척인 뒷산에 올라 산나물과 잔대도 몇 뿌리 캐어 왔다.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잔대는 살짝 데쳐 칼등으로 자근자근 두드려 펴서 양념고추장에 재워 굽고 들기름 넉넉히 넣고 산나물을 무쳤다. 정성은 다했지만 차려놓고 보니 온통 풀뿌리, 풀잎 잔치다. 이제는 가슴에 달아드릴 꽃을 준비해야 하는데 봄꽃들은 졌고 여름 꽃은 피지 않아 어설픈 때였다. 두리번거려도 예쁘고 화사한 꽃은 보이지 않고 밭둑에 무리 지어 핀 노란 꽃들이 손짓하듯 흔들린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애기똥풀꽃이었다. 꽃을 꺾었다. 대궁에서 노란 액체가 송글송글 맺혔다. 우리 아이들이 배냇짓을 할 때도 저런 빛깔의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았던가. 어머니와 나와 아이들, 그것은 한 끝으로 이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고리요 인연이 아닐까 싶었다.
어머니 가슴에 그 꽃을 달아 드리고 식탁에도 방에도 그 꽃을 꽂았다. 어머니는 그 날 아침 진지를 아주 달게 드시고 금세 시들어 버린 풀꽃송이를 가슴에 단 채 종일 밭에 계셨는데 어느 해보다도 우리 고부간에는 풀꽃 같은 정이 교류된 어버이날이었다.
먼 길을 떠나 와서 그 때를 생각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함은 드린 것 없이 따뜻한 사랑만 받은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지만 이처럼 작은 일에 감동하기는 드문 일이다.
나에게는 가계부처럼 쓰여지는 공책이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을 사랑출납부라 부른다. 거기에는 숫자가 적히는 것이 아니고 부피나 무게로도 계량할 수 없는 것들이 적힌다. 일테면 붐비는 전철 안에서 우리 어머니께 자리를 양보해 준 아가씨의 마음이 오렌지 빛깔로 칠해져 있고 무거운 짐을 들어준 시골 아저씨의 순한 눈빛도 거기 적혀 있다.
무심히 스친 무심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작은 친절들이, 익명으로 착한 일 하는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향기를 풍기는 것은 작은 일에 감동하는 나의 취각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몹시 화낼 때 잠잠히 기다려준 친구와 옹고집 잘못을 말없이 용서해 준 사람들, 허물을 덮어 준 형제와 이웃들, 그들의 이해와 감사줌이 풀꽃처럼 피어나서 우리의 삶을 생기 있고 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전에는 그것을 몰랐다. 받아도 받아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이었다. 그런데 자식의 자리에서 부모의 자리로 옮겨지고 이웃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살면서 그런 생각들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것이다. 걸프전쟁이 끝난 직후 부상당한 이라크 병사를 간호하는 연합군 병사의 모습이 TV화면에 비쳤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있다.
사람에게 노년을 허락한 것은 이런 후회의 계절 앞에서 젊어서 못다한 일을 마저 하라는 유예의 기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 서울에 돌아가면 투정하지 말고 어머니처럼 고부간의 사랑도 화초 기르듯 물 주고 정성 들여 키워
나가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맨 끝자리에 섰을 때 지출이 많은 사랑출납부를 헌정했으면 하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