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행 / 박헬레나
역행
박헬레나
자동차 한 대의 역주행으로 충돌사고가 일어나 여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갈림길이 애매하게 설계되어 잠시 방심하면 실수하기 쉬운 곳이라 자주 같은 유형의 사고가 난다고 한다.
역행이 어디 꼭 길 위에서만 일어나는가. 세상 삶에서 거꾸로 가는 일을 수없이 본다. 부모를 거스르는 자녀, 불목 하는 형제, 사사로운 감정으로 상관을 해치는 하극상(下剋上), 모두가 마주 달리다 부딪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역행에는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이 담겨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거슬러 행한다는 원인이 깔려있다.
흐름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제 길이다. 물길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 지난 시절에는 배움도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무엇이든 모르는 것은 어른에게 여쭈어 답을 얻었고 먼저 산 이들의 지식과 경험은 아랫대의 스승이었다.
그 순리를 거역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자식 훈육철학은 ‘온고지신’이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배워라’였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이 다섯 살만 되면 아침잠을 자게 두지 않았다.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정신이 맑을 때라는 것이 당신의 지론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비비며 어두컴컴한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는 시간이 정말 싫었다. 다섯 살에 한글학습, 다음 단계엔 천자문, 조금 더 자라면 명심보감을, 장성한 나이가 되면 예절을 가르쳤다. 특히 남의 가문에 보낼 딸들에게 더 엄격하셨다.
스무 살이 되어가던 어느 날 제례(祭禮)에 관한 아버지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여가만 나면 지방 쓰는 법부터 제복(祭服)마름질과 제문(祭文)짓는 법까지 가르치시려 들었다. 언니들은 그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여 아버지의 소망대로 신구(新舊)를 겸한 신부가 되어 출가했다. ‘옛것을 알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익히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치셨지만 내가 보기엔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저 그거 안하겠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넷째인 내가 감히 반기를 들었다. 집안 최초의 항명사건이었다. 멈칫하신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버지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의 ‘온고지신’은 더 이상 동생들에게 내려가지 못하고 내게 이르러 끝을 맺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가치와 제도를 시시각각 붕괴시킨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던 나의 생각과 신지식도 이미 낡아 별로 쓸모없이 되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격변하는 이 시대에는 배움도 역행한다. 우리가 내려줄 것 보다는 아랫대로부터 배울 것이 더 많다. 문명이 낳은 이기들에도 우리는 무식하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일은 큰 숙제다. 손자에게 일일이 물어가며 더듬거린다. 자꾸 묻기 미안하니 손자를 ‘선생님’이라고 최상의 존칭을 써가며 묻고 또 묻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손자에게, 아래로 흐르던 가르침이 아래서 위로 역행한다.
어느 신문에서 칼럼을 읽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에 ‘낫이 뭔데요?’하고 아들이 묻는다고. 낫을 본 적이 없는 요즘 청소년들의 당연한 질문일 터이다. ‘기역자 놓고 낫을 모른다.’로 옛 속담도 거꾸로 가야 한다.
명절차표를 매입했다. 역무원이 ‘역행입니까?’ 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내외가 자식의 집에 설을 쇠러 간다. 아이들 셋이 다 수도권에 있으니 남들이 고향을 찾아 귀향할 때 우리는 낯선 도시 한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역행이다.
ktx가 생기기 전 아이들이 명절승차권을 구하느라 전날 밤부터 동대구역에서 밤샘을 했다. 자리와 함께 이불을 들고 오는 진풍경이 벌어지도 했다. 그 고역을 해결할 방책이 역행이었다. 거꾸로 가는 길을 두고 많이 망설였다. 편의주의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 끝이 어디일까, 막가는 저급한 삶에 가 닿는 지름길이 아닐까,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편리를 택했다. 참으로 어색하던 그 행위도 이제 차츰 익숙해져 간다. 고향을 찾는 푸근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어쩌겠는가, 명분만 고집하며 세월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으니 어쩌면 역행이 이 시대의 순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다가온다. 흩어져 있던 가족과 일가가 한 자리에 모인다. 세대에 따라 주제와 색깔이 다른 이야기도 오가고 모처럼의 기회에 집안의 대소사도 의논한다. 개인의 의견차이도 있을 것이고 저마다의 가슴에 못 다하고 남겨둔 이야기가 왜 없을까만 자기주장만 하며 맞부딪치는 일은 아직 없다. 위아래를 분별하는 위계질서와 혈연이라는 연대의식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때, 사랑은 아래로도 흐르고 위로도 흐른다.
역류(逆流), 역모(逆謀), 역린(逆鱗), ‘역’(逆)이 들어가는 단어는 다분히 부정적 의미를 띄고 있지만 거꾸로 거슬러 오를수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사랑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지만 젊은이들이 윗대를 염려하고 걱정을 할 때, 작은 배려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사랑이 역류할 때, 그 향기는 더욱 진하고 감동적이다. 치사랑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속살만큼이나 붉다. 사랑은 역행을 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