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내 / 루이제 린저
인내
루이제 린저 (독일소설가)
언젠가 나는 다섯 살 어린애가 알을 품고 있는 암탉한테서 알을 빼앗아 가지고는 ‘병아리가 나오나 보려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병아리는 그 아이의 눈앞에서 죽고 말았다.
몇 주일 전에는 내가 여러 해 전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한 일본 여대생이 유럽으로 오게 되었는데 종이로 접은 작은 새가 가득 든 바구니를 선물로 가져왔다. “그건 꼭 천 개예요. 선생님께 드리려고 만든 겁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일본에서는 소중한 어떤 것을 기원할 때 매일 새 한 마리를, 즉 순수함과 충실함의 상징인 학을 한 마리씩 접어 만드는데 천 개를 만들면 소원이 성취 된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가 바랐던 것은 유럽에서 공부하고 내 곁으로 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천 마리째의 학을 접고 나서야 그녀는 독일로 오는 장학금을 얻게 되었다.
<페르귄트>라는 연극에 보면 남편은 어느 날 젊은 아내인 솔베지를 홀로 남겨 놓고 모험을 찾아 떠나간다. 늙어서 그가 돌아왔을 때 역시 늙은 솔베지는 집 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내란 기다리는 것이며 기원하던 것을 바라는 것이다. 반대로 조급함이란 기다리지 못하고 앞질러 행동해서 바라던 것을 이루기도 전에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조급함이란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란 발굽으로 마구간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망아지와 비슷하다. 그들은---그들의 독단적 생각으로---밖에는 커다란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급함이란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이 되기는 하지만 이런 조급한 행동 때문에 불행한 일이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랑이나 결혼 생활을 하게 될 정도로 성숙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의 모험에 빠져 사생아를 갖게 되어 낙태하거나 남에게 아기를 맡기는 일 또는 감당할 수도 없는 결혼을 서두르게 되고 때로는 자신을 뛰어난 사람인 양 생각해서 남들 앞에 돋보이려고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조급함이란 바로 이런 성숙치 못함을 뜻한다.
그러면 우리 성인들은 어떤가? 우리 역시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을 깨뜨려 보는 어린애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환멸과 고통밖에는 얻는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간혹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줄지어 서서 기다리기가 싫어서 위험하게 추월하여 자신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결혼 생활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이혼을 함으로써 성실한 마음과 시련을 이겨 내는 사랑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어린애의 자연스런 정신 발전을 침착하게 보고 있지 못하고 앞질러서 아이에게 과대한 요구를 하여 아이로 하여금 일생토록 불안과 열등감과 이로 인한 병적인 명예욕 같은 불치의 노이로제를 갖게 한다.
성공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지나친 신경과민으로 결국은 심장병만 얻는 경우도 있다. 불운을 참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감수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은 경솔하게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것 외에도 크고 작은 수백 가지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조급함이란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함을 이와 같이 아름답지 못한 형태로 본다면 그것을 정말 원죄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급한 사람은 모든 것을 성급한 자기 자신에만 맞춰 생각하려 한다. 무엇인가 생각할 경우에도 자신은 모든 것을 신속히 생각한다고 여기며, 좀더 철저하고 신중히 생각하는 다른 사람은 둔하다고 여긴다. 자기는 적극적이고 충동적이며 두 다리로 즉시 일에 뛰어들기 때문에, 착수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한다. 자기는 결정을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기를 요구하며 성급한 말과 행동을 억지로 하게끔 만든다. 성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쉽게 생각하고 그들의 정상적인 발전의 리듬을 파괴하기 때문에 항상 불행만을 초래한다. 성 바울이 사랑이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라 말했는데, 그것은 곧 조급함이란 사랑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것으로 사랑은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급함은 또한 명예욕의 한 형태이다. 무엇인가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성공을 위해 광포하게 서둘러 댄다. 그러기 때문에 조급함이란 약자의 표지이며 불안의 표지이다. 강한 자만이 인내를 가질 수 있다. 이 말은 다소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마치 인내란 우둔하고 활동력이 약하고 소극적인 사람들만의 일인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조급함이 곧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혁신가나 지도자들의 일인 것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내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포기해 버리고 마는 ‘숙명주의’와 같은 게 아니란 말인가? 조급함이란 젊고 발전하는 민족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인내란 늙고 지친 민족들의 특성이 아닌가? 어떤 속담에서처럼 인내는 정말로 장미꽃을 갖다 주는 것일까? 옛 황제 시절의 러시아의 신앙심 깊고 끝없는 인내에서 일종의 착취인 농노의 노예 상태가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인내는 1971년 혁명의 피에 굶주린 성급한 기세로 전복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오늘날 아프리카 민족들의 남다른 조급함 때문에 아프리카에는 새로 시작되는 정치적인 기폭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설문을 통해 우리는 인내란 것이 소극적이며 받아들이고 감수하기만 하는, 여자들의 천성에 어울리는 여성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적인 성급함은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아닐까?
‘파우스트 같은’ 인간의 성급함만 없었다면 세계는 훨씬 더 나았을 것이고 전쟁은 없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아프리카 민족들이 그렇게 경솔하고 무분별하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일면 적극적인 특성과 함께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내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보자.
인내라는 단어 속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듯하면서도 결국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두 가지 뜻이 숨겨져 있다. 그 하나로 ‘인내하다’라는 동사는 참고 견딘다. 고통을 참는다는 뜻인데 그것은 사실 꽤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인내하다’라는 동사의 또 다른 뜻은 ‘관대함’이란 외국어로 표시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허용한다, 다른 것을 인정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존중하고 다른 생활 방식도 옳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용은 악함이나 무능한 소극적 태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강한 자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사물이 올바르게 되어질 때까지 신뢰감을 가지고 기다릴 수가 있다. 마음이 침착한, 강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다른 식의 생존을 인정할 수가 있으며 타인들 때문에 자신의 생존에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인내란 확실히 남성적인 덕(德)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힘차고 뛰어나고 더 많은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내가 남자들의 전형적 속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침착할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여자라면 남자보다 더 인내심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제에 관해서 논란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인내란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표지이며 그러기 때문에 또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 인내하는 자가 바로 승리자인 것이다. 인내라는 말에는 고통을 참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인내한다’는 동사는 참는다는 것, 즉 고통을 이겨 낸다는 뜻도 나타내고 있다.
브레히트의 짤막한 에피소드에서 나는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을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이런 얘기다. 한 남자가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다. 그러자 그는 노젓기를 그만두고 배 안에 넙죽 누워서 그냥 떠가도록 내버려 두고는 파도가 그를 육지 어느 곳으로든 밀려가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내란 스스로 자신을 운명에 내맡기고 무엇인가가 되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거대한 힘에 맡겨 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내란 바로 용감성이다. 자기의 귀부인에게 명예를 걸고 모험에 출정한 중세 초기의 기사는 용감히 싸워야만 했다.
조급함이란 것이 인생을 해결하는 가장 적합한 해답인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인생은 역시 우리에게 참는 자만이, 즉 길게 숨을 쉬는 자만이 결국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