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때, 그 사람 / 이태선
그때, 그 사람
이태선
운전하는 노신사의 뒤통수에 눈길이 꽂혔다. 조수석에 앉아 취기로 횡설수설하는 마누라를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일 일이 대답하는 전라도 억양의 어눌한 말투와 악수할 때 잡았던 두툼하던 손. ‘어디서(?)’라는 희미한 물음표 하나가 사느라 어질러진 내 기억의 창고 밑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하던 해 숙모가 초등학교 정문에 문방구점을 열었다. 우리 집하고는 버스로 두 정류장쯤의 거리였다. 삼촌은 육군 장교였다. 주말이면 사촌동생을 돌보아 주거나 문구점 일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고등학생이 노트와 4H연필을 사러 왔다. 노트와 연필을 찾아주고 돈 계산 할 것을 기다렸지만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때는 6·25전쟁 후라 물자가 귀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종종 학용품이 없어지곤 했다. 머뭇거리는 학생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엉겁결에 큰 소리로 숙모를 불렀다. 달려온 숙모는 학생을 보자 반색을 하며 돈도 받지 않고 보내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숙모는, 남학생의 고향은 전라남도 영광이며 야간 상업학교에 다니는 건실한 학생이라고 했다. 돈이 없으면 필요한 학용품을 가져가고 집에서 돈이 오면 여지없이 계산을 한다며 다음에는 달라는 대로 주라고 했다.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던 난, 그 학생이 오빠나 된 듯 좋았다. 학용품을 사러 와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해 주었다. 대학은 서울로 갈 것이며 모윤숙의 시 <랜의 애가>를 약간 어눌한 말투로 낭송해 줄 때는 너무 근사해 보여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단발머리 소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쁜 농사철이라도 무슨 핑계를 대든 문구점엔 꼭 갔다. 가는 동안에도 달콤한 솜사탕이 다 녹아 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달렸다.
밤톨만큼 부푼 젖가슴이 시도 때도 없이 뜀박질을 해댔다. 웃음이 앞섰고 그만큼 눈물도 많았다. 그때의 내 별명은 울보였다.
소설 《유정》을 훌쩍거리며 읽고는 그 영화를 봤다. 하얀 눈밭에 빨간 피를 토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 죽는 장면에는 나도 피를 토하며 죽는 슬픈 주인공이 된 듯 울었다. 비 내리는 강둑을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귀가 아프도록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차츰 잦아지던 어느 날. 숙모는 친정 남동생의 결혼식에 가고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학생이 노트를 사러왔다. 마침 숙모 친정집에서 보내온 인절미가 있어 한 접시 내놓았더니 맛있게 먹고는 물을 찾았다. 부엌에서 물을 가져오자 학생은 두툼한 손으로 노트 값을 쥐어주고는 허둥지둥 가게를 나가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별 생각 없이 접힌 돈을 펴는 순간 하얀 종이쪽지가 있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9월 10일 시민운동장 정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나오십시오.”
그러나 정작 내가 나가야 할 시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늦어도 열흘에 한 번씩은 노트나 연필을 사러오던 학생이 오지 않자 숙모가 걱정을 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숙모에게 쪽지 받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시간을 적어 놓지 않아 나가지 못한 속사정도 모른 채 문구점에 오지 않는 학생이 원망스러웠다. 밥맛도 없어졌고 그 많던 웃음도 사라졌다.
소설 속의 슬픈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의 주인공이 되어 그해 겨울은 눈밭에 빨간 피를 토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다 죽는 꿈을 꾸느라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질렀다.
애가 타 밤톨만큼 솟은 가슴이 숯검정이 되건 말건 이 산 저 산은 다투어 봄을 불렀다. 삼촌이 부산으로 전근을 가게 되어 문방구는 문을 닫았다. 가끔 길에서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을 보면 그 자리에 한참씩 서 있곤 했다. 어디선가 불쑥 <랜의 애가>를 낭송해 줄 때의 어눌한 말투로 이름을 부를 것 같아서였다. 그럴 때는 한손으로 그가 돈을 쥐어줄 때 잡혔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눈물 많고 웃음 많던 단발머리 소녀는 세월을 가로질러 할머니가 되었다. 계절이 바뀌거나 비가 내리면 가슴이 무단히 젖는다. 알지 못할 그리움이 가슴에 물결쳤다.
2년에 한 번씩 갖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올해는 서울에서 가졌다. 꽤나 성공한 남자 동창이 환갑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동창회를 자기가 주관하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친구들과 상경했다.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 있는 동창의 건물은 웅장했다. 밴드까지 동원한 만찬에 기분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 우리를 같은 동창인지 아닌지 얼굴도 아삼아삼한 여동창이 남산 드라이브와 숙식을 제공하겠다며 자기 남편을 불렀다. 우리는 동창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하룻밤 잠잘 곳이 해결되는 꿩 먹고 알 먹는 횡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후 도착한 동창의 남편은 혀 꼬부라진 마누라의 소개로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은발의 노신사는 어눌한 말투로, 만나서 반갑다며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전라도 억양의 어눌한 말투와 두툼한 손….
이름도 꼬부랑한 비엠더불유 뒷좌석에 엉덩이를 얹었지만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져버린 인생 사십여 년이 닳을 대로 닳아 밋밋한 빨래판 같은 가슴을 몹시도 흔들었다.
영화의 여주인공보다 더 아픈 가슴앓이로 열여섯 살 꽃순 같은 가슴을 핏빛으로 물들게 했던 내 첫사랑. 운전석에 앉은 노신사의 은발머리가 자꾸 하얀 눈밭으로 보였다. 그 눈밭에 이름을 부르며 쓰러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