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유월 / 반숙자

희라킴 2016. 3. 21. 08:26

 

유월

 

                                                                                                                                    반숙자

 

 한 해도 반 고비에 들어섰다. 정월부터 오월까지가 무에서 유를 파종하는 시기라면 유월은 결실을 시작하는 일 년의 후반기에 해당한다.

 

 올 유월이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조금 높은 지대인 농막에서 내려다보면 초록, 초록의 향연이 안정감 있게 펼쳐진다. 봄의 새순이 나풀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듯 신선하고 환희롭다면 유월의 새순은 뿌리로부터 든든한 양분을 빨아올려 성장하려는 나무의 깃발이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산만하지 않다. 바로 앞 과수원에서는 열매 솎기가 끝난 사고나무에 새순이 일제히 올라와서 초록바다가 된다. 새순은 곧게 올라온다. 아래 논에는 지금 세 포기씩 심은 볏모가 새끼치기에 바쁘다. 거기서 내뿜는 초록빛은 바로 생명이고 밥줄이다.

 

 이 나이에 잃었던 유월을 다시 찾는다. 열두 살 나이로 치룬 6.25 한국전쟁 이후, 나의 목가적인 유월은 실종됐었다. 유월은 포탄이 날아오고 사람이 죽어가고 배고픔과 공포에 떨던 기억으로 채색되어 초록빛 찬란한 본연의 계절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수십 년이 흐른 이제 아픈 기억은 잘려나가고 내 감관으로는 유년에 보았던 그 유월이 들어와 있다. 농막 창으로 채색되는 고추밭이랑이 한 폭의 동양화다. 유연한 곡선으로 이랑을 타서 심은 푸르게 자라나는 고추와 이랑과 이랑 사이에 내비치는 흙빛의 조화가 구도며 색채의 미적 정점을 이룬다.

 

 며칠 전 미타사 선다원에 들렸을 때 팽주(烹主)인 우담보살은 보이차를 우려 찻잔에 따르며 산나물을 뜯으러가자는 이웃의 말에 멧돼지가 새끼를 쳐서 더 사나워지므로 위험하다고 했다. 그렇다. 유월은 만물의 어미들이 부지런하게 새끼를 쳐서 종족을 번성시키는 산달이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밭 갈고 씨 뿌려 모종해 기르는 작물들이 제자리에 착근을 하느라 몸살을 하다가 비로소 안정하호 성장을 하는 때다. 하늘에서는 장마라는 우기를 두어 작물에 충분히 물을 대준다. 그 바람에 농부들은 굽은 등을 펴고 편히 쉬며 애호박을 따다가 밀적을 부쳐 일하느라 소원한 이웃과 막걸리잔 기울이며 정을 나눈다.

 

 하지가 들어있는 유월은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이 다가온다. 그 풍경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소재다. 햇감자는 하지가 지나야 제대로 여문다. 또 하지 전후해서 장마가 들기에 시골에서는 그때가 감자와 마늘의 수확적기다.

 

 감자를 캐서 헛간바닥에 펴놓으면 엄마는 잔챙이부터 먹으라고 성화를 댔다. 그때는 흰 감자는 드물고 자주감자여서 큰 물박에 담아다가 몽당숟갈로 껍질을 벗기는데 시간인 많이 걸렸다. 어머니는 어린것이 답답했던지 옹기자배기에 감자를 쏟아서 보리쌀 으깨듯이 으깨면 껍질이 벗겨졌다.

 

 유월은 텃밭에 첫 오이를 따는 때고 마디마디 매단 마디호박을 한꺼번에 열 개도 넘게 따는 시기이고 방아다리 고추가 주렁주렁 입맛을 돋우는 때다. 비 오는 날이면 텃밭에 상추를 따다가 부득부득 씻어 잘박한 된장찌개 넣고 보리밥 한 양푼 비벼 소담스레 퍼먹는 축복의 계절이다.

 

 가을에 심어 첫 수확을 하는 겨울을 난 밀이며 보리, 마늘을 수확하는 시기다. 여인의 자궁 안에 새 생명이 자라듯 유월은 살아있는 것들이 제 자리에 안착하며 안으로 성숙하는 축복의 계절이다. 꽃모종도 콩 모종도 들깨 모종도 유월까지다. 이시기가 지나면 모든 심어진 것들은 더 이상 옮기지 않고 제자리에서 성장한다. 그래서인가 인도에는 동안거 하안거와 함께 우안(雨安居)가 있다고 한다. 비를 맞으며 활발하게 돋아나는 초목의 생명활동을 훼방 놓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가만히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라는 것이다.

 

 유월의 초록빛을 선명하게 받쳐주는 것은 망초꽃 무리다. 산 밑 묵정밭에 무리지어 피어나는 망초꽃의 흰빛은 초록을 껴안은 어머니의 치맛자락 같다. 푸근하다. 거기 몸을 던져 낮잠 한번 실컷 자고 싶다. 나는 지난 60여 년간 망초꽃을 6.25전쟁에 죽어간 장병들의 혼령들이 꽃이 되어 피어났다고 생각했다. 무심하지 못했고 아팠다. 학교 다닐 때 육이오 날이면 방송국에 가서 전사한 국군장병들을 위해 조시를 안송하며 예민한 소녀는 반공의식으로 무장했다. 그 사이 60년이 흘러갔다. 역사로 치면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이다.

 

 이제는 그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무심히 망초꽃을 본다. 망초꽃을 평화롭다. 해질녘이면 그 꽃은 더욱 아스라해져서 천지에 활력으로 넘치는 계절의 분망을 고요히 받쳐주고 있다.

 

 사람을 생각한다. 사람의 유월은 어디쯤일까. 팔십을 산다면 사십이 반 고비일터, 내 인생의 유월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다시 찾은 유월을 만끽하며 나도 올해는 조용히 우안거에 들어가 볼 참이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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