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세상 나누기 / 정여송

희라킴 2016. 3. 21. 08:24

 

세상 나누기


                                                                                                                                   정여송


  “대박 터졌다!”

  커다랗게 부푼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나둥그러진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박을 켜던 사람들의 눈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쪽’이란 생각에 잡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상품광고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어디를 배경으로 잡을까. 어떻게 스케치를 할까. 무슨 색상을 입힐까. 몇 달 며칠을 생각에 잡혀 끌려 다닌다. ‘하나인 세상을 명징하게 나눠 봐?’ 짓궂은 착상에 갑자기 닻을 내린다. 옳거니! 불끈 쥔 주먹이 허공에 대고 힘을 찍는다. 기를 모은다. 포개놓은 기왓장을 깨듯 손날을 세운다. 내리친다. 강얼음이 “쩡”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음양陰陽, 선악善惡, 명암明暗, 흑백黑白, 진퇴進退, 천지天地, 미추美醜,

진위眞僞, 주야晝夜, 종횡縱橫, 강산江山, 이해利害, 냉온冷溫, 내외內外,

시종始終, 빈부貧富, 왕래往來, 고저高低, 장단長短, 상하上下, 경중輕重,

전후前後, 좌우左右, 유무有無, 강약强弱, 요철凹凸, 피아彼我, 건습乾濕,

출몰出沒, 공사公私, 허실虛實, 자타自他, 신구新舊, 이합離合, 좌립坐立,

상벌賞罰, 출입出入, 손익損益, 득실得失, 수지收支, 다소多少, 원근遠近,

이동異同, 개폐開閉, 시비是非, 단복單複, 발착發着, 귀천貴賤, 생숙生熟,

진가眞假, 청탁淸濁, 완급緩急, 송수送受, 문답問答, 호부好否, 정동靜動,

승패勝敗, 영육靈肉, 찬반贊反, 표리表裏….

 

 영영 맞서서 경쟁만 할 줄 알았다. 웬일인가. 상극에 치닫는 단어가 둘이서 손을 잡고 나란히 붙어 선다. 서로 다르면서 어울리는 방패와 창처럼. 우호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방어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 상호 모순된 충동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둘 사이에는 1:1의 평행선상을 유지하면서도 1+1=2의 순리를 빚어낸다. 손을 잡는 것은 기댈 수 있음의 여지이고 서로 돕자는 증표이며 합하여 키우는 힘이다. 그래도 둘의 힘보다는 셋의 힘이 클 터, 다시 내리쳐 셋으로 나눈다.

 

천지인天地人, 의식주衣食住, 진선미眞善美, 육해공陸海空, 유불선儒彿仙,

상중하上中下, 불법승佛法僧, 대중소大中小, 풍여석風女石, 공가중空假中,

지인용智仁勇, 양상제養喪祭, 일월성日月星, 자검겸慈儉謙, 법보응法報應,

덕공언德功言, 전현후前現後, 정신기精神氣, 조중석朝中夕, 군사부君師父,

적녹청赤綠靑, 초중종初中終, 지덕체智德體, 적황청赤黃靑, 위촉오魏蜀吳,

조용조租庸調...

 

 삼행에서 풍겨나는, 숨 막히는 언어의 진경을 발견한다. 삼총사의 의리가 서린다. 셋의 어울림. 톡톡 튀면서도 서있는 순서와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그러나 생각이 자꾸 막히면서 둘 만큼 잘 나눠지지 않는다. 억지가 붙는다. 게다가 불안한 한 가닥 기분은 어찌하지 못한다. 힘은 커졌으나 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 고독감이 창조의 힘을 분출시키는 도구라 할지라도 셋 중 하나가 외로움을 탈 것 같다. 한 번 더 내리쳐 넷으로 나눠 그 마음을 보듬는다.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 춘하추동春夏秋冬, 건곤이감乾坤離坎,

회삭현망晦朔弦望, 단주모야旦晝暮夜, 남녀노소男女老少, 수화토석水火土石,

효제충신孝悌忠信, 도천지왕道天地王, 경사자집經史子集, 지수화풍地水火風,

갑을병정甲乙丙丁, 흥망성쇠興亡盛衰, 생로병사生老炳死, 동서고금東西古今,

신언서판身言書判, 건곤간손乾坤艮巽, 기승전결起承轉結, 가감승제加減乘除,

이목구비耳目口鼻, 형제자매兄弟姉妹, 매난국죽梅欄菊竹, 연월일시年月日時,

길흉화복吉凶禍福, 사농공상士農工商, 조율이시棗栗梨柿, 시서예악詩書藝樂,

문행충신文行忠信, 원형이정元亨利貞, 관혼상제冠婚喪祭, 예의염치禮義廉恥...

 

 힘도 힘이려니와 꿍짝꿍짝 율동이 있으니 흥이 돋는다. 네 박자는 안정감마저 불러와 버팀목으로 선다. 나 홀로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인 중창이다. 사방 풍광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넓은 파문은 여운을 크게 그린다. 가늠하기 어려운 통찰력과 포용력을 싸안고 있다. 장성한 4형제가 나란히 선 듯 든든해지기도 한다. 호연한 기운이 솟는다. 내친김에 다시 한 번 더 내리쳐 다섯으로 깨트린다. 생각을 굴리고 펴고 다듬는다. 그런데 내내 보물찾기만 한다.

 

희노욕구우喜怒欲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

지신인엄용智信仁嚴勇, 황백적홍청黃白赤紅靑,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한열풍조습寒熱風燥濕, 시청후미촉視聽嗅味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청황흑녹적靑黃黑綠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희노애락욕喜怒哀樂慾,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개걸윷모...

 

 찾아낸 보물 다섯 조각을 주섬주섬 꾸러미에 꿴다. 다층적이고 풍부한 울림을 토해낸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든다. ‘도’와 ‘모’ 사이에 ‘개’와 ‘윷’이 끼어 서자 ‘걸’이 또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나란히 선다. 단어들이 늘어서서 동갑내기들 모양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하얗게 쌓인 눈이 밭고랑을 지워나가듯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엇비슷해진다. 나누어질수록 차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어우러진다. 가까이서 보면 색종이만 있을 뿐인데 멀리서 보면 일사불란하게 변화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매스게임이듯 공동체를 이룬다.

 

 무엇이든 힘들여 이루면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나눠진 조각세상을 열 맞춰 세운다.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 글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뜻을 밝히는 범위가 나눈 만큼 넓어진다. 나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기쁨처럼, 인정처럼.

 

 쪼갠 조각들을 유수히 들어다 본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시근이 멀쩡하고 당당하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비장한 구호는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 손잡고 뭉쳐야 여물고 단단해진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얼마든지 나누고 자르고 쪼개어 보라. 아무리 가른다 해도 세상은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