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 7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 이혜연

화장(化粧)과 민낯 사이 이혜연 “다 늦게 뭐 하는 거야?” 장 본 것들 정리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곧 아버지가 들어올 시각이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퉁바리를 놨다. “이제 아버진 남자도 아니라며?” “….” 나는 다시 한번 퉁바리를 주었다. “정 없다며? 정 버린 지 오래라며?”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 없이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의 입술은 와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색깔이었다. “정 뗐다는 말 말짱 거짓말이네 뭘.” 어머니는 심통이 나 퉁퉁 불어 있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고관절 수술로 불편해진 몸을 어렵사리 일으키며 한마디 툭 던졌다. “정은 무슨…, 여자의 자존심이다.”..

좋은 수필 2022.01.12

[2022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껍질의 길 / 김도은

[2022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껍질의 길 김도은 건조했던 나의 귀가 수족관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에 촉촉해진다. 병원 관리원이 복도에 있던 유리 속 세상을 대청소중이다. 호스를 타고 들어온 투명한 물줄기들이 수족관으로 콸콸 쏟아지고 물이끼로 불투명했던 유리 안쪽 세상이 말갛게 깨어난다. 붕어, 잉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앉았던 수초가 다시 일어선다. 느릿느릿 우렁이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입원 중인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작년에 결혼해 임신한 딸이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무생채를 해볼 참이다. 막상 무를 사 오기는 했는데 무생채를 만드는 일이 아득하다. 커다란 무를 썰려니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칼을 힘주어 누르니 중간에 단단히 꽂혀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아삭아..

문예당선 수필 2022.01.04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쪽항아리/ 김희숙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쪽항아리 김희숙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 제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가작 당선작] 웃는 남자 / 정의양

[2022 제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가작 당선작] 웃는 남자 정의양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람의 뒷모습을 어쩌면 저리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편안한 모습이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김홍도의 염불서승도를 바라본다. 운해 속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 한 선승의 참선하는 뒷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삭발한 머리는 달빛에 파르라니 빛나고, 가녀린 목선을 따라 등판으로 흘러내린 장삼이 구름과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하늘은 난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스님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내 얼굴을 생각한다. ​ “얼굴 좀 펴라”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남들처럼 눈 코 입 하나 빠진 거 없는 외모이기는 하나 표정이 없어 그게 문제다. 아마도 삼신할미가 생명을 점지하고, 마지막 미소 한 ..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막사발의 철학 복진세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종이접기 / 이춘희

[2022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종이접기 이춘희 색종이 위에 온 마음을 담는다. 모서리를 맞추어 엄지로 지그시 누른다. 멀리 떨어진 꼭짓점을 맞대고 힘주어 문지른다. 접을수록 좁아지는 종이를 따라 마음도 쪼그라든다. ​ 종이접기는 유년의 나를 다양한 상상의 나라로 데려갔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 손오공을 만나고, 돛단배를 타고 무인도에 발을 디뎠다. 종이 인형에 빨간 저고리와 초록 바지를 입히며 엄마가 된 듯 흐뭇했다. 완성품을 만날 때마다 동심은 꿈속을 걸었다. 그 뒤로 성취감과 자신감이 따라왔다. ​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색종이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종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며 마음의 종이를 무던히도 접었다. 교과서적인 ..

문예당선 수필 2022.01.03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돌챙이 / 오미향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돌챙이 오미향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자, 암벽 위에 작은 돌집이 보였다. 벼랑 위 깔깔한 소금기를 벗 삼아 삶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는 삭정이 같은 무릎을 보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만 불어도 거친 말 한마디만 내 던져도, 금세 기울 것 같은 수평을 아버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숭숭 구멍 뚫린 관절에 햇볕을 끌어모으고 먼바다를 내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잊었다는 것인지 다 지나간 일이라 모른다는 것인지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물 쓴물 다 빠진 아버지의 빈 가슴에 찾아 든 것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마음도 마른 웅덩이처럼 젖어들었다. 말랑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울컥했다. ​ 아버지가 평생 쌓아 놓은 돌들은 말이 없다..

문예당선 수필 2022.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