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백조의 발자국 / 변해명

희라킴 2017. 2. 6. 19:49





백조의 발자국


                                                                                                                                        변해명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먹 같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호수에 날아 든 겨울 철새 백조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 일행은 니이가타新瀉에서 동경으로 가는 신칸센을 타러 가던 중 효코瓢湖 백조의 호숫가에서 버스를 세웠다.


 이곳 호수의 백조는 러시아에서 날아온 철새란다. 10월부터 4월까지 300마리에서 800여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새가 날아드는 것은 이곳 주민들이 철새에게 먹이주기를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그 호수는 백조의 도래지가 되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좀처럼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어려운 백조가 이곳에서만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이 날아든다고 하니, 이 곳 주민들의 백조를 향한 사랑과 정성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텃새도 아닌 철새가 겨울이면 잊지 않고 다시 날아와 겨울을 지내고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이곳은 백조들에게 낙원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을 일구어낸 이곳 주민들 삶의 철학에 존경이 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마침 백조에게 모이를 주는 시간인 듯 두 사람이 호수 위에서 어부가 그물을 던지듯 모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호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리 모양의 나무로 만든 난간 위에서 이곳 저곳으로 기능한 한 모이를 멀리 뿌리듯 던지는 아래로 청둥오리와 백조가 모이를 향해 몰려가고, 그가 뿌린 모이를 받아먹으려고 서로 엉겨 첨벙거렸다.


 야생 오리와 백조의 무리가 한데 어우러져서 전혀 낯설지 않게 사람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마치 길들여진 동물원의 새들 같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물가로 다가갔을 때 백조들은 의젓한 자세로 청둥오리들 뒤편에서 유유히 고개를 들고 떠 있었다. 수백 마리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선율 속에서 군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눈 내리는 회색빛 공간에서 군무를 즐기는 백조를 처음 보는 일이어서 발레의 ‘백조의 호수’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한참을 그들만을 지켜보다가 문득 물가에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깜찍한 세 가닥의 발자국들은 서로 어우러져 옷감의 무늬처럼 눈 덮인 호숫가에 화폭을 깔아놓았다.


 그 발자국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의 무늬로 보였다. 눈이라는 흰 화폭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들은 오리나 백조가 상징화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한두 마리의 발자국이라면 새의 가냘픈 발자국으로 느껴지겠으나 워낙 많은 발자국들은 이미 발자국이 아닌 새의 집단 이미지만을 구축해내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마리의 백조라도 뭍으로 올라 내게 와 주기를 기다려 보면서 백조의 발자국이 밟힐까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발자국들은 무리를 지어 호수로 들어간 흔적이다. 더러는 옆으로 가기도 하고 멈춰 섰던 흔적도 있지만 되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감각은 질서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흔적 속에는 수만 리 창공을 날아와 머무는 철새의 삶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 흔적은 하늘에서 내려와 착지할 때 내딛는 발자국이나 비상을 준비하는 발자국을 숨긴 휴식과 평온함, 부드럽고 가벼운, 그래서 눈에 덮여 이내 지워질 그런 흔적들로 보였다.


 백조가 이곳을 떠날 때 일제히 날아오르는 비상의 흔적은 어떤 자국으로 남겨질까? 아마도 그 흔적은 힘 있고 강렬한 인상이 담기는 흔적으로 찍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생동감이 넘치는 자연의 그림을 겨냥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버스에 오를 시간이 되어 호숫가를 떠나면서 우리들이 남기는 흔적도 저러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보았다. 생각이 합치고 마음이 모여 하나로 흘러가는 아름다운 물결, 누가 이끄는지 드러나지도 않지만 서로를 배려해서 서로가 화합하며 하나가 되는 물결,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국일 것 같았다.


 그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군무를 보지 못한 채 그곳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백조와 오리의 공존, 그리고 그들이 남기는 흔적의 발자국들은 인상적이었다.


 나는 겨울이면 가끔 서산 천수만, 강화도 개펄 등지에서 겨울 철새들을 바라본다. 해질녘 수백만 마리의 겨울 철새들이 펼치는 비행의 군무를 바라보면 장엄한 교향곡을 들을 때처럼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작은 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진 무리가 다시 유연한 선을 그으며 한삼자락을 휘젓는 춤사위로 휘돌아 오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그 모습은 생명의 약동, 하나가 되는 질서와 화합의 교향악이다.


 새들은 멀고 먼 둥지를 떠나 겨울을 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르고, 먼 창공을 향해 멀리 떠나는 고달픈 여정이 이어지지만, 그 여정이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힘이다. 수천 km를 날아오는 작은 새들은 함께 날고 있음에 가능할 것이다. 철새가 지니는 삶의 신비, 그것을 새삼 되씹어본다.


 나는 버스로 돌아가면서 눈밭에 찍힌 내 발자국을 되돌아본다. 사람들도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시간의 모래 위에 작은 발자국 하나가 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 발자국이 훗날 새의 발자국 속 아름다운 한 폭 그림의 한 획이 되어 은하수 속의 별처럼 모든 별에게 한 시대를 함께 한 흔적의 배경이 될 수 있을까?


 고대인은 인간의 고향은 하늘이므로 땅에 내려와 살다가 죽으면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큰 새의 깃털로 꾸미는데, 죽은 이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나도 죽어 신탁으로 새가 된다면 이 호숫가의 백조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한 마리 백조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다. 내가 이 땅에 남기는 발자국은 이내 지워져버리는 여린 발자국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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